- 에피소드 1.
“트렌드 방향으로 애슬레져 룩이 지속됨에 따라 디자인 팀에서는 전 시즌보다 업그레이드 된 네오 애슬레져 룩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Athletic과 Leisure 의 합성어인 Athleisure Look은 심플하면서도 컨템포러리한 무드의 착장에 조거팬츠, 스니커즈 등의 스포티한 아이템을 미스매치하여 뉴감성으로 완성시키는 룩을 말합니다. 전 시즌보다 새롭게 업그레이드 되는 디자인은 무엇보다 어스매트릭한 라인과 루즈하고 룸감있는 실루엣인데요, 블라블라블라......”
S팀의 수장인 P실장은 17년도 봄 시즌 품평의 테마를 설명하는 중이다. 그녀의 프리젠테이션을 듣고 있노라면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주는 조사만 한국어이고 온통 영어 단어로 도배가 되어 있다. ‘이것이 영어냐 한국어냐.’ 하는 비난을 받을지라도 어쩔 수 없다. 우리가 늘 몸에 걸치는 이 모든 것들은 한복이 아닌 서양 복식이 그 뿌리인 지라 그들의 패션과 트렌드를 설명하는 용어의 대부분은 영어가 잘 어울린다. 물론 이것을 국어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우리말로 전부 바꿔 표현할 수도 있다.
“유행 방향으로 생활체육 차림이 지속됨에 따라 디자인 부서에서는 전 계절보다 진화된 새로운 생활체육 차림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생활과 체육의 합성어인 생활체육 차림은 단순하면서도 현대적인 분위기의 착장에 밑단고무줄바지, 운동화 등의 스포티한(대체할 한국어가 없다.) 물건을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게 착장시켜 새로운 감성으로 완성시키는 형태를 말합니다..”
아, 어찌 보면 국어사랑의 문제라고 해야겠다. 우리는 영어에 이미 익숙해져 있고 특히 패션을 표현할 때 더욱 그렇다. 굳이 국어로 바꾼다면 바꿀 수 있겠지만 입안에서 어울리지 않게 겉도는 것이 영 이상하다. 기묘한 것은 영어단어 사이에 조사만 붙여 이상한 어법을 구사하는 모습이 세련되게 보인다는 점이다. 너무 서양 사대주의적인 감성일까?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주목할만한 점은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모든 직원이 모인 회사 대회의실에 화려한 PPT 실력을 뽐내는 업무는 현실 세계에서도 디자인팀 팀장과 실장 정도라면 능숙하게 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패션 트렌드와 시즌 컨셉의 PPT를 능숙하고 세련되게 할 줄 아는 디자이너일수록 애석하게도 영어단어를 남발(?)하게 되지만 말이다.
테마와 컨셉을 만드는 업무는 다음시즌을 준비하기 전, 상품에 입힐 고유한 컬러와 향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다음 시즌에 매장에 나갈 상품을 기획하기 전 단계로 시즌 분위기의 구조와 틀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다른 부서에게도 제시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여기서 디자인팀 실장의 화려한 PPT 능력이 요구된다. 드라마 속 멋지고 패셔너블한 주인공이 연출하는 그 씬을 내가 현실에서 직접 해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직업에 대한 판타지가 생기기 충분하지 않은가?
PPT를 하는 사람은 담이 크고 용감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수많은 연습과 훈련으로 발표능력을 키우는 편이 좋을 것이다. PPT를 잘 해내면 뜨거운 호응과 함께 보람과 환희까지 경험할 수 있지만 너무 긴장하고 위축된 나머지 이 소심한 마음에 동반되는 말실수, 말더듬이가 이어질 경우에는 그 자리에서 '똥‘ 이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 말이다.
- 에피소드 2.
“S씨, 배우 공유씨 왔으니까 와서 신체 사이즈 좀 재 주세요. 상동 허리, 힙 둘레 이렇게요.”
S가 소속된 N브랜드는 이번 한 시즌에 공유를 브랜드 광고모델로 스카웃했다. 공유는 피팅할 옷의 사이즈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서 S가 일하는 회사에 방문했다. 평소 공유의 팬이었던 S는 공유가 회사 광고모델이 된 것만으로도 기쁜데 그녀의 실장이 회사에 방문한 공유의 신체사이즈를 재라는 지령을 내린 것에 공유를 만나기 전부터 설레어서 넋이 나갈 지경이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품평이 모두 끝나고 상품이 매장에 나가기 전, 각 브랜드는 자회사의 상품을 홍보하기 위한 카달로그와 광고촬영을 하게 된다. 좀 더 효과적인 홍보를 위하여 그 시기에 핫하게 떠오르는 연예인을 고가의 모델료를 감수하고 계약하기도 한다.
디자이너는 광고촬영 당일,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만든 옷을 멋진 배우나 아이돌 스타가 입고 포즈를 취하는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모델이 톱스타일 경우 연예계의 소소한 소식을 취재하는 프로그램에서 이 광고 촬영장면을 담고 인터뷰를 진행함으로써 디자이너의 옷을 미리 홍보해주는 효과도 누릴 수 있다. 내 옷에 대한 애착을 더 느낄 수 있는 계기이자 디자이너 직업에 대한 흥미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