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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가장 얇은 유리천장

by 이라IRA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앞서 언급했듯이 패션 디자이너 세계에도 유리천장은 있다.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도 흔하다. 동년배 남성디자이너에 비해 낮은 연봉을 견뎌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국내의 다른 직종에 비해 패션 세계의 유리천장이 그나마 가장 얇다고 생각한다. 패션 디자인은 여자가 자신의 역량으로 팀 안에서 가장 높은 직급까지 올라가기에 다른 직종보다는 확실히 덜 어려운 분야이다. ‘매출이 곧 인격이다.’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우리 분야에서는 실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실적만 꾸준히 유지하고 중도에 출산과 육아 문제로 퇴사만 하지 않는다면 진급은 다른 분야에 비해 더 수월한 편이다. 출산과 육아문제를 2순위로 두는 일이 한국 여성들에겐 매우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현재 한국의 20대 취업준비생 중에서 공무원을 제외한 여성의 희망 직업의 1순위가 스튜어디스라는 사실 말이다. 기내에서 고객의 가방을 들어주고 식음료를 서빙하며 기내 화장실을 청소하는 단순서비스 직군인 스튜어디스가 여성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라고 한다. 나는 10대 경제대국 중 하나라고 자부하는 한국에서 이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어떤 직업이든 여성으로서 정상직급까지 올라가기 힘든 점이 매한가지라면 젊은 나이에 반짝 고수입을 얻을 수 있는 스튜어디스를 선호하는 현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고 해야 한다. 스튜어디스 채용조건으로 유난히 외모를 따지는 한국 항공사들의 특수한 전통(?) 때문에 스튜어디스는 ‘예쁜 외모로 돈 많은 남자들의 눈에 띄어 시집 잘 가는 신데렐라 등용문’ 같은 직업이 되어있다. 그리고 이는 미주나 유럽의 선진국들이 스튜어디스라는 중노동의 서비스직을 뽑을 때 힘세고 덩치 좋은 여성을 선호하는 점과는 뚜렷하게 대조되는 점이기도 하다.

탑승객의 무거운 짐을 번쩍번쩍 들어야 하고 역시 20키로가 넘는 무거운 식음료 카트를 끌고 다닐 수 있는 근력과 체력을 요구하는 스튜어디스를 채용할 때 한국은 왜 굳이 외모를 따지는 걸까? 국내에서 여성으로서 선호할만한 직업이 얼마나 없으면 스튜어디스가 선망의 1순위 대상이 되었는지 알만하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남자에게 시집 잘 가는 것이 아직도 21세기의 한국여성들의 ‘성공한 인생’인가 보다.


그래서 사실 여성패션디자이너 중에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이 큰 이들도 많다. 막내디자이너의 연봉은 2천대 초반으로 최저 임금 수준에 머무르지만 직급이 올라갈수록 능력과 재량에 따라 때로는 큰 폭으로 연봉을 올릴 수도 있으므로 팀장과 실장급이 되면 다른 직종, 같은 직급의 평균임금 수준을 훨씬 웃도는 고액연봉자도 될 수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패션디자이너의 수명은 30대 후반에서 끝이었다. 차장급인 실장직책이 디자이너로서 팀의 수장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였고 이 나이대가 보통 30대 후반에서 많아봐야 40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CD(Creative Directer)라는 디자인 디렉터 역할의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디자이너의 수명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이다. 여성복 분야에서 디렉터는 억대 연봉을 받는 경우도 (손에 꼽지만) 존재하기는 하니, 대한민국의 전문직 여성으로서 이만하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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