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디자이너들은 야행성인 인간형이 많다. 주위가 훤한 대낮보다 어둡고 만물이 고요해지는 밤에 번뜩이는 영감을 받는 예술인들이 많듯이 디자이너 또한 그렇다. 문제는 전 날 철야를 하든 무리한 회식으로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든간에 다음날 아침 9시 정각에 칼같이 출근을 해야만 한다는 점에 있다.
예전에 어떤 숙취해소용 음료 광고에서 재미있는 콘티를 본 적이 있었다. 전 날 회식자리에서 과음을 한 직원이 자신이 지각한 변명을 하다가 상사 앞에서 토하는 장면이었다. 아, 상사가 따라주는 술을 잔뜩 받아 마시고 다음날 뒤집어 지는 속을 달래면서 뛰어오는 그 직원의 출근길이 머릿속에서 훤하게 그려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일만 하다 집에 돌아가는 일과가 쌓이면 주간의 삶은 ‘회사, 집, 회사, 집’의 기계적인 일상이 된다. 우리 디자이너들은 실제로 이런 기계적인 일상을 사는 이들이 많다.
“이 일(패션디자이너직)을 하면 주중 개인적인 시간은 포기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내가 신입디자이너 입사전형 중의 면접 때 실제로 면접관(그 당시 모 브랜드 실장)에게서 들었던 질문이다. 면접관은 근로자의 권리를 깨끗이 포기하는 태도가 마치 면접 평가 기준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인 마냥 진지하게 이 질문을 던졌었다. 더 희극적이었던 것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상관 없습니다. 저는 야근형 인간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과거로 돌아가 그 질문에 다시 답할 수 있다면 그 멍청했던 대답 뒤에 이런 멘트를 덧붙일 것이다.
"회사에서 야근수당을 주거나 탄력근무제를 실시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나라 노동법에 근거한 근로시간은 주 40시간이다. 주당 40시간 동안 일하는 것을 법으로 하고 5일 동안 근로자가 이 시간을 자율적으로 분배하여 지키는 탄력근무제는 야행성인 사람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불가피하게 철야하는 날이 꼭 있어야 할 업무라면 푹 자고 늦은 아침에 출근하면 여러 사람이 좋다. 그럼 다음날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정시 출근하여 비몽사몽 하루를 다 버리는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졸면서 일하다가 허리 위치에 와야 할 포켓이 가슴으로 올라가서 붙어버릴 수도 있고 제 길이가 되어야 할 소매가 긴팔 원숭이의 팔처럼 길어질 수도 있다. 정작 집중해야 할 중요한 일을 망쳐버리는 결과이다.
회사의 대표님들은 왜 탄력 근무제를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 피로가 쌓인 직원들의 머리 속에서 얼마나 참신한 아이디어와 혁신적인 생각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몸이 고되면 머리도 굳는다. 몸이 아프면 마음의 여유도 사라진다. 어떤 일이든 여유로운 몸과 마음일 때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월차, 보건휴가는 말할 것도 없고 야근수당, 주말 수당도 일체 없는 노동착취,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자르는 비인간적인 해고, 여자의 결혼과 출산에 대한 무언의, 때로는 대놓고 드러내는 부정적인 반응과 차별은 아직까지 한국 패션회사의 슬픈 모습이다.
현재 패션회사의 출산휴가는 고작 3개월이고 육아 휴직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달랑 3개월뿐인 이 출산휴가를 화사 측에서는 나름 엄청난 손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사오너는 가임기의 직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저 출산과 인구고령화에 따른 미래의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장 큰 사회적인 문제 중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거의 재앙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하여 패션 회사는 재앙을 더 심화시키는 데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노동자 개개인이 부유해야 내수가 튼튼해지고 장기적으로는 각 기업, 나아가서는 국가경제도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부강해져야 그 다음에 개개인이 잘 살 수 있게 된다는 ‘낙수효과’에 대한 믿음은 이미 깨진지 오래 되었다. 직원 개개인이 여유롭고 행복해야 결국엔 회사의 이익 창출에도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결국엔 그것이 궁극적으로 회사전체에 이익을 가져오는 길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근로시간이 짧고 직원의 복지가 잘 되어있는 회사일수록 업무효율성과 생산성이 더 높아진다는 사실은 그 동안의 연구와 조사 결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유럽, 미국,·일본 등 의 많은 선진국들은 유연근무제를 통해 노동시장의 효율성을 도모하고 있다. 유연근무제는 현 시점 노동정책의 세계적인 추세이다. 한국만큼이나 노동시간이 많다는 일본조차도 최근 원격근무제를 바탕으로 하는 재택 근무제를 확산시켜 2017년에는 전체취업 인구의 20%까지 원격 근로제를 확산시켰고 최근에는 원격 근로제를 적용한 주 4일 근무제 또한 시행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장기적인 이익과 더불어 회사와 국가전체의 발전을 원한다면 이제는 '워크하드 (Work Hard) '가 아닌 ‘스마트 워크 (Smart Work)' 의 환경 조성을 다 같이 고민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