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디자인팀이 있다고 가정하자.
디자인 A팀은 업무권한이 피라미드식 구조이다. 따라서 디자인에 관한 모든 결정권은 실장에게 있다. 아이템별 담당디자이너는 자신의 모든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실장의 허락을 받고서야 세상에 내 놓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팀의 한 시즌의 컬렉션은 사실상 그 디자인팀의 실장의 컬렉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장의 감각과 트렌드 분석능력에 따라 한 시즌의 매출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실장의 역할과 결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해지는 셈이다.
A팀은 막강한 권한과 권력이 모두 실장에게로 집중되는 대신에 매출결과에 따른 책임 또한 실장에게 전부 지워지는 구조이다. 따라서 실장의 어깨에 다른 팀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중한 짐이 지워진다. 그러나 급여 또한 그만큼 실장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다른 팀원들과 실장의 연봉을 비교해 보면 대체로 그 갭은 상당하다.
디자인 B팀은 각 담당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의 고유권한을 부여한다. 실장 바로 아래 급 디자이너부터 막내 디자이너까지 모두 자신의 아이디어를 품평 전 샘플에 반영할 수 있다. 실장은 한 시즌의 큼직한 방향과 컨셉을 정하고 적정한 가격과 컨셉 안에서 디자인의 진행 가능 여부만 판단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업무 진행상에 있어 어려운 부분을 풀어주고 조율해주는 관리자 역할에 집중하고 담당디자이너의 디테일한 디자인 결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디어로 만든 모든 디자이너의 샘플은 품평 때 타부서사람들과 매장 매니저들의 평가를 거쳐 선정하는 방식으로 한다. 따라서 매출 결과에 따른 책임은 실장뿐만이 아니라 각 담당 디자이너에게도 돌아간다. 결과가 좋으면 담당 디자이너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그 반대일 경우 적정한 책임을 묻는다. 여기에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만큼 급여에서도 실장과 팀원과의 차이는 A팀처럼 심하지 않다. 팀원이라도 자신의 아이템의 매출 결과가 타 아이템에 비해 월등하게 좋을 경우 인센티브가 높아져 실장보다 더 높은 급여를 받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A와 B 팀 중에서 어느 팀이 더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일까? 또한 과연 어느 팀이 더 좋은 매출 실적을 내게 될까?
매출 결과는 알 수 없다. A팀의 실장이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특출한 감각과 상품 적중 능력을 겸비했고 리더십 또한 탁월하여 조직을 잘 이끄는 인재라면 A팀의 결과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희귀할 뿐만 아니라 설령 그런 사람이 리더의 위치에 있더라도 A팀의 팀원들은 업무에 대한 별다른 권한과 결정권이 없는 위치에서 능동적인 태도를 갖기 어려울 수 있다. ‘어차피 내가 하는 모든 것을 타인(실장)이 결정할 일’이라면 업무에 B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자세로 임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모든 권력이 부서장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조직은 팀원들이 부서장의 눈치를 보느라 경직된 분위기가 되기 쉽다. 그런 팀 안에서는 원활한 의사소통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반대로 내가 한 결과물에 대해 내가 책임지는 시스템을 갖춘 환경에서 좋은 실적에 대해서는 적절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업무에 능동적인 태도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책임감과 결정권을 동시에 갖게 된다면 누구의 허락과 컨펌을 받으면서 눈치로 일해야 하는 상황 아래 놓인 사람보다 ‘나의 일’ 이라는 생각이 더 커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의 개성과 아이디어가 반영된 다양한 디자인 중에서 한 시즌의 스타일을 결정한다면 그 결과가 더 좋을 가능성도 높다.
팀 구성원이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팀은 확실하게 B팀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자율적인 분위기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과 애착도 더 강해질 것이다. 이는 비단 패션 쪽에만 국한된 사실은 분명 아니다. 개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시스템을 갖춘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라면 누구나 일하고 싶어 할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패션회사는 모든 업무의 권한과 더불어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각 부서의 부서장에게 집중되어 있는 구조와 조직을 갖추고 있다. 책임을 조직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분배하여 부서장에게 집중된 막중한 책임감을 덜어준다면 서로서로 좋은 일 아닐까.
앞 서 얘기했지만 권한이 팀의 장(長)에게 집중되면 서열구조가 생기고 업무 분위기도 경직되기 쉬워진다. 부서장에게 자신의 업무에 관련된 사항을 일일이 컨펌 받고 진행해야 하는 구조 안에서는 업무진행의 스피드와 효율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인지라 각 시즌별 상품이 계획한 날짜에 정확히 맞추어 매장에 출고되는 사항은 아주 중요하다. 일의 진행이 늦어져 옷이 매장에 나가지 못한 날짜만큼 판매율에 손실을 입기 때문이다. 상품 납기(생산마감기한)가 판매와 직결되는 패션계에서 서열구조가 뚜렷한 조직 시스템은 회사의 이익창출에 오히려 방해가 될 소지가 큰 것이다.
부서장에게 권력이 집중된 조직은 또한 팀원들 간의 눈치싸움과 더불어 ‘사내정치’라는 것이 생기기 쉽다. 사내정치가 심해지면 개개인의 업무능력보다는 인정에 이끌린 인사처리를 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장기화 되면 팀 내의 실적과 회사의 수익 면에서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팀원의 자율성을 강화하면 그 조직에도 이롭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 독일의 군대개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07년 나폴레옹 군대에게 완패한 독일 군대는 나폴레옹의 군대에서 독특한 점을 발견하고 이를 수용하게 된다. 나폴레옹 군대가 유럽의 다른 국가의 군대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모든 권한이 가장 높은 상부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돌발적인 전장 상황에 맞춰 일선의 지휘관이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대응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이를 관찰한 독일(당시 프로이센)은 군대의 철저한 상명하복식의 구조를 개혁하기 시작한다. 하위계급에게 전보다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등의 고착화되었던 예전의 군대규율을 타파한 프로이센 군대는 이후 군의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1871년에 독일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사고방식과 발상의 전환이 조직을 강화시키고 나아가서는 한 국가를 통일에까지 이르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비단 군대 뿐 만이겠는가. 어떤 조직이라도 서열주의를 완화하고 개인의 자율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이 바뀐다면 개개인의 실적과 더불어 회사전체의 이익에도 더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무엇보다 직원의 ‘창의성’과 창조적인 업무를 가장 중요시해야 할 분야라면 더더군다나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