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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열정페이

가장 적게 받고 가장 많은 일을 하는 막내디자이너

by 이라IRA

- 에피소드


“막내야, 이 티셔츠에 이 점퍼 피팅좀 해봐 ”

“막내야, 이 스타일, 이런 디자인으로 도식화 좀 그려라.”

“막내야, 이 부자재들 종류별로 정리 좀 해놓을래? ”

“막내야, Summer 진행스타일 꼬마도식화 맵 좀 만들어줘.”

“막내야, 이 작업지시서들 싹 카피 좀 해올래? ”

“막내야, 우리 배고픈데 간식 시켜주라~”


스물 넷 김막내, 온갖 잡일로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판이다. 온 종일 디자인팀의 실장과 팀장, 선배디자이너들까지 다섯 명의 서브와 심부름의 잡일을 하느라 영혼이 나가버릴 지경인데 여기에다

“막내야, 너 막내지만 네 아이템 하나는 잡고 진행해야 일을 빨리 배우니까 앞으로 네가 티셔츠 아이템좀 맡아서 해 볼래?”

이건 그야말로 헬 게이트가 열린 상황이다. 집에 가지 말고 일만 하라는 건가. 김 막내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내느냐에 따라 앞으로 디자이너로서 자리를 잡을 것인지, 아니면 계속 언니들 뒤치다꺼리와 허드렛일만 도맡아 할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일까지 쳐내려면 낮에는 선배들 심부름만 하다가 윗 사람들이 퇴근하고 나면 비로소 자신이 맡은 아이템에 관련된 업무를 차분하게 할 수가 있다. 이는 자연스럽고도 장기적인 야근으로 이어진다. 막내디자이너는 가장 적은 급여를 받으면서 모든 직급의 디자이너들 중에서 가장 일이 많다.

김막내는 서브와 자신의 업무를 동시에 쳐 내는 업무보다 더 고통스러운 업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진행하는 스타일의 모든 샘플을 피팅해야 하는 업무이다. 실제로 그녀가 회사에서 할애하는 시간의 절반은 피팅모델 역할을 해 내는 데에 있다. 김막내는 디자이너인 동시에 피팅 모델인 셈이다. 패션 회사의 막내 디자이너, 열정 페이를 받고 뭐든지 다 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옷이 상품으로 매장에 출시되기 전까지 매 진행과정에서 나온 샘플을 입어봐야 할 전문적인 피팅 모델이 필요하다. 사이즈 기준은 보통 남자 상동 100Cm, 허리 30~32 Inch로 정하고 여자는 상동 85Cm, 허리 26 Inch로 정하여 샘플을 투입하는데 기준 사이즈의 옷을 피팅 시키기 위해 우리는 이 사이즈에 딱 떨어지는 ‘몸’이 필요하다. 따라서 의류회사에서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피팅 업무를 하는 피팅 모델을 고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피팅은 옷을 입고 착용감이 어떤지 피드백을 주는 단순 업무에 가까운 터라 대부분의 회사는 주로 아르바이트 형태로 피팅모델을 고용한다.

그런데 기업 입장에서는 아르바이트보다 인건비를 더 절약하는 방법이 있다. 아예 피팅이 되는 몸매의 신입디자이너를 채용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럼 따로 고용할 필요가 없게 되는 셈이다. 실제로 패션 회사들은 신입디자이너 채용 시 피팅이 가능한 신체 사이즈를 입사조건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키와 몸매가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쉽게 뛰어들기조차 힘든 현실이 벌어지는 것이다.


신체 조건이 안되더라도 입사할 수 있는 회사는 있다. 키즈 패션회사나 가방, 신발과 같은 악세사리 디자이너, 그리고 의류회사의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OEM디자이너가 이에 해당된다.

협력업체란 브랜드를 갖고 있는 의류회사로부터 생산대행을 의뢰받고 정해진 기한 내로 상품을 납품해 주는 업체를 말한다. 이를 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생산방식이라고 하는데 협력업체가 주문자가 원하는 디자인과 상표명으로 생산을 해 주고 이에 따른 결재를 받는 방식을 말한다. O.E.M 업체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는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의 옷보다는 브랜드 디자이너가 의뢰한 디자인의 의도와 퀄리티 기준을 정확하게 반영하여 옷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한 업무이다. 때문에 패션세계에서는 서로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협력업체 디자이너를 브랜드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보다 레벨이 낮은 B급 디자이너라고 여기고 있다. B급 디자이너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싶은 사람은 없기에 패션디자인 전공자 중 디자이너를 희망하는 학생들은 협력업체보다는 브랜드 디자이너의 진로를 더 선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체조건이 되지 않으면 브랜드 디자이너를 지망해도 입사하기가 힘들다. 피팅이 되는 몸매와 167 이상의 키를 입사조건으로써 같이 요구받기 때문이다. 아, 얼굴도 같이 보던가? 예쁘지 않은 얼굴은 옷도 같이 미워보이게 한다는 이유이다. 몸매 베이스에 얼굴도 예뻐야 신입디자이너로 입사하는 데에 유리하다는 현실, 미스코리아 선발전에 가서 막내디자이너를 물색하는 편이 더 빠를 지경이다.


얼굴과 몸매를 기본으로 갖추고 온갖 잡일을 빠릿하게 쳐 내야 하며 하루 빨리 자기 아이템 하나를 잡아서 진행할 수 있는 막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은 참 가혹하다. 정글이 따로 없는 셈이다. 현직에서 살아남은 디자이너들은 극한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기민한 행동력과 무쇠같은 체력, 외모 베이스를 갖춘, 수퍼우먼급 혹은 수퍼맨급의 막강한 실력자(?)들이다.

막내디자이너는 주간에는 선배들의 서브, 야간에는 자기 일을 하기 때문에 가장 늦게까지 일하다가 퇴근하는 가엾은 존재들이다. 야근수당은 당근 없다. 막내디자이너 연봉은 최저임금제 적용 전에는 정규직일 경우 적게는 1600만원 대에서 많게는 2000대 초반이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최저임금제가 시행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 불쌍한 막내들도 일한만큼은 아니지만 ‘초박봉’수준은 면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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