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요 몇 달을 야근에 찌들어 살다시피 하는 S는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씻고 멍하게 있다가 잠드는 것이 일과의 전부이다. 아홉 시 정시에 출근해서 많게는 점심시간을 제외하여 열두 시간씩 일하다 보면 금방 열 시, 귀가하여 씻고 나면 금방 자정이 되어버리기 일쑤인 S는 퇴근 후 개인 시간을 가졌던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피로는 쌓이고 최근에는 감기까지 걸렸지만 도무지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 감기가 걸린 상태로 과중한 업무를 강행했더니 결핵까지 발전한 적도 있었다.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몸을 사려야 하지만 야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반복된다. S는 몸과 함께 마음까지 같이 병들어가고 있다. 아니, 마음의 병이 더 심각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으레 그런 것.’이라는 인식, 직업의 특성상 ‘야근에 쪄든 생활은 디자이너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의류업계 종사자들에게는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현실에 S는 종종 어이 없고 화가 나기도 한다.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야근 수당을 받는 패션 디자이너는 대한민국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야근, 특근이라는 것이 인정조차 되지 않고 당연시 되거나 회사가 야근수당을 교묘한 방법으로 연봉에 포함시킨다. 이 계약서에 노동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사인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연차를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연봉 수당 역시 연봉에 은근 슬쩍 포함되어 있어도 별 수 없다. 월차나 보건 휴가 같은 건, 더더군다나 꿈도 꾸지 못한다.
불합리한 근무환경에서 기계처럼 돌려지면서 일하는 디자이너들 사이에 아직 노조라는 것은 없다. 그들 대부분은 아직까지 노동자의 권리에 무지하며 회사에 몸바쳐 일하는 것을 정말 ‘숙명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그들은 지옥 같은 업무 환경을 견뎌내고 살아남는 방법을 스스로 찾을 뿐이다.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노동으로 숙련된(?) 그녀들은 (여자 패션 디자이너가 훨씬 많기 때문에 ‘그녀’라고 지칭하겠다.) 일에 대해서는 세상 어떤 직종보다도 빠릿빠릿하고 기민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지적 수준은 매우 비루하다. 수준 이하의 지적소양을 갖춘, 텅 빈 머리끼리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매우 제한적이다.
“왜, 노회찬 같은 사람이 죽어야 할까?”
“노회찬이 누구지?”
“....”
“이번에 조성진 리사이틀 티켓 구매하는 데 성공했어요!”
“사이클 경주 좋아하시나 봐요”
“....”
“위대한 유산, 나는 영화보다 책이 훨씬 더 좋았어.”
“임창정 나오는 그 영화가 책으로도 원래 있었어?”
“....”
다른 지식을 탐구할 시간도, 다른 체험을 누릴 체력적인 여유도 없는 디자이너들이 세상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는 단연 ‘연예계’이다. 웃고 씹으면서 놀 수 있는 연예인들의 가십은 그들의 대화의 중심, 아니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정치적인 큰 이슈가 정부에게 약점으로 작용하려는 찰나, 정부에서 의도적으로 터뜨린다는 연예계의 굵직한(?) 가십들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세상 어느 것보다 중요한 화두가 된다. 디자이너들은 정부가 국민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쳐 놓은 그물에 기꺼이 1등으로 걸려드는 공신이 된다. 디자이너들은 각종 드라마를 두루 섭렵하고 있으며 톱스타의 스캔들에서부터 소소한 가정사까지 서로 경쟁하듯이 알고 있다. 연예계에 대한 그들의 정보력에 매번 혀를 내두르는 나는 연예계 정보에 뒤처질 때엔 사람들에게 트렌디하지 못한 인상을 줄까 걱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짬을 내서 인터넷에서 떠도는 연예계의 가십 기사를 클릭하고는 정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