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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의무 'COPY'

우리는 카피캣

by 이라IRA



- 에피소드


지금은 품평 기간이다. 시즌 품평은 디자이너가 최대한 에너지를 쏟아 정성스럽게 준비해야 하는, 학생들로 치자면 기말고사와도 같은 중요한 평가 퍼포먼스다. 이날 다음 시즌에 매장에 나갈 상품이 결정된다. 일종의 ‘디자인 선발대회’쯤 된다고 보면 되겠다. 품평 일은 디자이너의 트렌드 예측능력과 상품 구성 능력, 디자인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받는 아주 중요한 날이다. 매장에 출시되는 옷을 제시하고 평가받는 날이기 때문에, 품평은 명품 브랜드의 디자이너 업무로 따지자면 ‘패션쇼’라고 불리는 런웨이 컬렉션 쇼를 펼치는 날이기도 하다.

S는 오래전 어느 품평 일을 떠올렸다. 옷들이 너무 난해하고 판매성이 없을 것 같다며, 대표는 S가 속한 팀의 실장에게 샘플들을 전부 다시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때 S의 디자인팀은 거의 한 달 가까이 밤낮과 주말도 없이 일에 매달렸다. 그때의 경험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품평 기간 동안 실장부터 막내 디자이너까지, 팀 전체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작업해야 한다. 철저한 전략을 세운 뒤 적중도 높고 완성도 있는 샘플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한 해의 첫 시즌인 대망의 스프링 Spring 품평 준비기간이 시작되었다. 아이템 별로 이번 시즌에 진행해야 할 스타일들이 정해지고 나자 실장은 각 디자이너에게 각자 하고 싶은 스타일과 디자인을 시각화시키는 스타일 맵 작업을 주문했다. 각각의 디자이너들이 하고 싶은 작업에 대해 실장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S는 그동안 만들고 싶었던 디자인의 사진들을 스타일별로 나누어 보드에 붙인다. 그동안 인터넷과 잡지, 시장조사를 통해 스크랩해놓은 것들이다. ‘오프 화이트Off White’와 ‘오프닝 세리머니 Openig Ceremoy’는 이번 시즌에도 호평을 받으며 승승장구 중이다. 실장 또한 두 디자이너를 매우 사랑했다.

S는 패션 정보 사이트에 들어가 후드에 스포티한 테이프를 패치하여 스트릿 룩의 정석을 보여주는 ‘오프닝 세리머니’의 맨투맨 티셔츠와 팬츠 밑단에 특유의 심벌의 아트웍으로 볼드하게 장식한 ‘오프 화이트’의 데님 팬츠를 스크랩하여 맵핑한다.

작업이 끝난 스타일 맵은 실장에게 가져가 샘플 진행 여부에 대해 결재를 받은 뒤, 디테일한 디자인까지 컨펌을 받는다. 실장의 취향을 눈치껏 잘 조합한 탓인지 S는 대부분의 스타일을 무난하게 컨펌받는다. 이제 이렇게 컨펌받은 스타일을 반영해서 샘플 작업지시서를 완성하는 것이 다음으로 할 일이다.

하지만 S의 작업은 두 디자이너의 스타일을 반영하여 재창조하는 작업이 아니다. S는 ‘오프닝 세리머니’와 ‘오프화이트’의 디자인을 디테일까지 그대로 카피한다. 컬러만 살짝 바꿔줄 뿐 디자인을 그대로 베껴내는 작업을 서슴지 않는다. 백 퍼센트 카피에 가까운 이 샘플 작업지시서를 받아본 실장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사인을 한다.

옆자리의 J는 울상이다. 실장의 취향에 따르기보다 제 디자인을 밀어붙이다가 삼분의 이 이상을 컨펌받지 못한 것이다. 실장의 컨펌 없이는 어떠한 샘플 작업지시서도 투입될 수가 없다. J는 자신의 샘플링만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 속상해 동료들에게 하소 연중이다.

“베트멍 Vetment 스타일 그대로 샘플 몇 개 내겠다고 해.”

“그래, 실장님 베트멍도 좋아하시잖아?”

동료들은 J에게 조언하지만, J는 자신이 하고 싶은 스타일을 1순위로 샘플링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

다시 스타일 맵을 컨펌받을 때, S는 서울 시내의 백화점들을 돌아보며 몰래 찍어둔 사진들로 맵을 구성 한다. 어쩌면 몰래카메라는 패션 디자이너의 매우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일 것이다. 몰래카메라로 찍은 옷과 디테일을 카피하고 활용하는 것은 디자인 업무의 꽃이자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다. 물론 국내의 이웃 브랜드일 경우 이러한 ‘몰카 자료’는 백 퍼센트 카피하는 데에는 큰 제약이 따른다. 때문에 ‘얼마나 교묘하게 카피하는가’가 최대의 관건이다. S는 타사 고가 브랜드에서 반응이 좋다는 스타일의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매장에 들어가 몰래 사진을 찍어온 뒤 실장과 상의한다.

“여기서 포켓과 칼라 형태, 버튼의 느낌과 컬러를 바꿔서 약간 다르게 샘플 내면 괜찮지 않을까요?”

실장은 그 자리에서 S의 의견을 리젝트reject 한다.

“아니, 포켓만 조금 바꾸고 나머지는 다 똑같이 해.”


‘모든 것이 카피 ’

자신의 소신으로 제시하는 순수 디자인은 실장에게 ‘근거 없는 디자인’이라는 오명을 쓰기 십상이다. S는 처음에는 이런 현실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한때 딜레마에 빠졌다. 옷이 좋아서 선택했던 직업이었다. 좋아하는 옷을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창작하는 일은 그녀에게 상상만 해도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입사해서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봤던 모습은 창작이라는 것은 온 데 간데없고 너도나도 ‘남의 옷 베끼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들 뿐이었다. 소위 말하는 ‘디자인 근거’라는 것이 없으면 샘플 작업지시서를 디자인 실장에게 결제받기란 매우 어렵다. 이 디자인 근거란 바로 남이 최근에 했던 디자인을 얘기하는 것이다. S는 처음엔 디자인실의 이러한 광경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실무를 하면서 차츰 알게 된다. 멀쩡한 디자이너들이 왜 다들 뻔뻔한 카피캣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브랜드마다 매 시즌 출시되는 옷들이 뼈를 깎는 것과도 같은 창조의 고통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면 애석하게도 그것은 큰 오해이다. 명품을 제외한 모든 옷은 어떤 방식으로든 카피, 모사, 차용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고가 브랜드는 명품 브랜드를 카피하고 중저가 브랜드는 고가 브랜드를 또 카피한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같은 가격 존zone에 있는 브랜드들끼리도 서로 카피한다. 가히 카피 천국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국내 내셔널 브랜드의 대부분의 패션 디자인은 그렇다.

겨울 아우터outer 한 벌에 백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 브랜드조차도 해외 명품 브랜드의 디테일 몇 부분만 바꾸어서 카피하고 이것을 중저가 브랜드에서 소재만 저렴한 품질로 교체하여 다시 베낀다.


2016년, 프랑스 브랜드 베트멍 vetements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패션 해체주의’를 전면 콘셉트로 내 건 베트멍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creative director (C.D라고도 한다.) 뎀나 즈바살리아 Demna Gvasalia는 기괴한 디테일을 모던한 감각으로 세련되게 풀어낼 줄 아는 디자이너로 호평을 받았다. 오버사이즈와 비대칭, 불규칙함을 과장하는 그의 디자인은 이 시대의 새로운 방식의 디자인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 창조적 해체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베트멍은 많은 셀러브리티 celebrity 들의 사랑을 받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당연히 국내의 모든 캐주얼 브랜드는 뎀나 즈바살리아의 디자인을 열광적으로 카피했다. 국내에 아직 입점도 되지 않았던 브랜드인데도 말이다. 나도 당시 베트멍의 데님 디자인을 대거 모방했다. 불규칙하고 무질서한 헴 라인 hem line과 예상하지 못한 부위에 과감하게 들어간 절개라인 등은 베트멍의 대표적인 디자인 패턴이었고 이와 유사한 디자인의 아이템들이 시즌 품평 날 잔뜩 걸려 있고는 했다.

한국에서 베트멍의 카피 제품이 범람하자 베트멍의 수석 디자이너 뎀나 즈바살리아 Demna Gvasalia는 2016년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오피셜 페이크 캡슐 Official Fake Capsule’이라는 작은 컬렉션을 열었다. 한국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는 베트멍 카피 제품을 재해석한 컬렉션이라고 소개하였는데 점잖게 표현하여 ‘재해석’인 것이지 한마디로 이것은 ‘ 짝퉁의 짝퉁’ 컬렉션이었다. 한국에서 활개 치는 ‘카피 문화’를 즈바살리아가 대놓고 조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컬렉션에 국내의 베트멍 마니아 2천 명이 모여들었다. 주말도 아닌 월요일에 열었던 이 컬렉션에서 한정판으로 내놓았던 모든 상품은 한 시간 만에 품절되었다.


한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는 몰카를 필수 불가결한 업무로 인식해 왔다. 나는 10년 넘게 디자이너 직에 있어오면서 셀 수 없이 많은 몰카를 찍어왔지만 지금도 이 업무를 수행(?) 할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린다. 신입시절에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내 심장소리가 들릴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쿵쾅거렸었다. ‘몰래카메라 찍기’는 실패하면 망신이고 별 탈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해도 그다지 기분 좋지 않은 미션이다.

요즘엔 여러 가지 성능 좋은 불법 몰카 앱들이 너무나 잘 나와서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행이다. 성 범죄자들이 애용하는 몰래카메라 앱을 필수품으로 소장해야 하는 우리, 이건 사실 어디 가서 우스갯소리로도 못하는 얘기이다. 중요한 업무임에도 우리 모두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스마트 폰이 없었던 시절, 디지털카메라로 서투르게 찍다가 나도 여러 번 들통이 난 경험이 있다. 핸드폰으로 찍는 것은 티가 덜 나지만 디카를 들이댈 때면 들통이 나기 쉬웠다. 탈의실에 숨어서 옷의 구석구석을 열심히 찍다가 매장 매니저가 눈치채서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어느 매니저는 에스컬레이터까지 쫓아와서 찍은 사진을 모두 지울 때까지 놓아주지 않기도 했다. 그 당시 모든 눈들이 나를 향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땅이 꺼질 듯 창피했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패션 디자이너는 왜 이렇게 모두 카피캣을 자처해야 할까? 패션과 트렌드가 생기는 과정과 흐름을 알면 어느 정도는 우리를 이해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얘기해 본다.

우선 ‘패션 트렌드’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패션 기관에 의해 매년 책정이 되어 패션계로 내려온다. 마치 ‘국제연합정치위원회’에서 수립되는 정책처럼 패션 트렌드도 국제적인 패션 기관에서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한 해, 한 시즌의 모드와 테마에서부터 컬러, 유행시킬 소재, 그래픽 패턴 등을 패션 기관에서 몇 가지 방향성으로 선정하여 내려준다는 사실을 디자이너들 외에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행이라는 것이 대중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보다는 정책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면 대부분 놀란다.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은 이 패션 정책과 방향 중 자신의 브랜드와 어울리는 트렌드를 수용하여 디자인에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제시되는 몇 가지 테마를 디자인으로 처음 구체화시킨 디자인만큼은 순수 창작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국내외 명품 디자인이 그러하기 때문에 명품 디자이너들은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예술가들이라고 평가해도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명품 이외의 디자이너들, 특히 내수 브랜드의 디자이너는 대부분 그들의 디자이너를 카피한다.


그렇다면 내수 브랜드의 디자이너는 어째서 창조를 하지 않고 출시하는 거의 모든 상품을 카피를 통해서만 만드는 것일까.

명품 디자이너들에게 패션 기관의 트렌드 정책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절대적인 패션 정보가 된다고 한다면, 하위의 상업 디자이너에게는 명품 브랜드의 디자인이야말로 그들이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할 패션 정보가 된다. 패션은 아래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물줄기와도 같은 것이다. 주류 패션에서 만큼은 대중이 유행을 창조하거나 이끌 수 없는 것이 최근까지의 ‘패션 정글’에서의 생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현상에서 조금씩 탈피하는 변화가 일고 있기는 하다. 위에서 언급한 ‘베트멍’의 뎀나 즈바살리아는 기득권과 주류문화에 저항하고 마이너로 취급되었던 자신만의 세계를 전위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인지시킨 아티스트이다. 그는 끝내 비주류였던 하위문화를 주류문화로 격상시켰다. 미국의 슈프림 Supreme과 반스 Vans도 사회적인 반항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그라피티와 스케이트 보드를 모티브로 브랜드를 론칭하여 지금은 미국의 캐주얼 브랜드 중 최고의 매출을 기록하는 브랜드로 부상했다. 이들은 최근의 캐주얼 패션 전반에 스트리트 street 감성을 퍼트린 장본인 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이너리티 minority가 메인스트림 mainstream이 되는 순간 그 브랜드는 또 하나의 카피의 대상이 되고 만다. 앞서 얘기했듯이 패션은 어찌 됐든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내려오는 성질이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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