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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허구’
드라마 속 패션 디자이너

빛 좋은 개살구

by 이라IRA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사람들은 패션 디자이너의 하루 일과를 어렴풋이 이렇게들 알고 있다.

‘최신 트렌드의 인테리어를 갖춘, 북유럽풍의 오피스텔에서 거주하는 어느 패션 디자이너,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맞으면서 일어나 여유롭게 식사를 한다. 영자신문을 들고 오피스텔 주차장에 내려온 그녀는 자신의 애마인 TT RS 쿠페를 타고 오픈카인 상태로 머리를 휘날리며 출근을 한다. 회사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아니, 코스타리카 따라주를 테이크 아웃한 그녀는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흡사 모델과 같은 남자 직원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다. 모던한 인테리어를 갖추고 먼지 한 톨 없는 깔끔한 사무실에서 그녀는 종일 일러스트레이터를 몇 장 그리다가 다섯 시 무렵 우아하게 퇴근할 준비를 한다. 곧장 퇴근하기가 아쉬워서 모델 같은 남자 직원들을 포함하여 친한 동료 몇 명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뒤 가까운 칵테일 바에서 데낄라를 몇 잔 마신 뒤에 유쾌하게 헤어진다.’

디자이너 세계의 리얼리티를 잘 모르는 타 직종의 사람들이라면 패션 디자이너의 삶은 으레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드라마와 매체에서 보여주는 디자이너의 일상이 모두 이런 모습이니까 말이다. 그들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자연스럽게 퇴근하고 취미생활, 연애 등의 모든 사생활을 제약 없이 잘 들도 누린다.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일해도 저녁때까지 일을 다 못 끝내기 일쑤인데 어떻게 그렇게 시간이 남아도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드라마 작가들 덕에 우리는 청소년들과 뭣 모르는 사람들에게 ‘워너비’ 직업군으로 통하기도 한다. 나 또한 고등학교 시절 그런 '뭣 모르던 청소년’이어서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다. (젠장..)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나의 직업을 불가피하게 얘기해야 하는 경우 사람들의 반응은 어김없이 이러했다.

“패션 디자이너라니, 멋지네요! ”

물론 이런 반응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쁘지는 않다. 전에 없던 긍지와 뿌듯함마저 새삼 생기니까 말이다. 그러나 패션 디자이너는 멋지지 않다. 매체에서 보여주는 패션 디자이너의 모습은 리얼리티를 모두 빼버린, 완전한 판타지일 뿐이다.


우리는 아침햇살을 맞으며 여유롭게 일어나기는커녕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간신히 눈을 뜬다. 야근으로 인해 턱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과 푸석한 얼굴을 거울 앞에서 마주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하느라 아침식사를 거르기 일쑤인 점도 여느 직장인들과 다르지 않다. 팀장 직급 아래로는 자차를 가질 수 있는 재정적인 여유는 어림도 없으므로 만원 지하철과 만원 버스를 이용해 통근한다. 영자신문? 내수 브랜드 디자이너에게 영어가 아예 필요 없다. 우리 중 대부분은 생활영어조차 못 한다. 영어 쓰는 업무를 거의 혹은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토익이나 오픽, 기타 영어점수를 따놓지 않아도 취업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외국에 본사를 두어서 정기적으로 해외에서 미팅을 해야 하는 디자이너 거나 무역회사의 밴더가 아닌 이상 말이다. 전 세계 패션도시를 돌아다니며 해외 컬렉션을 매 시즌 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라면 또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브랜드에 있었던 내 친구도 영어 한마디 못하고 일만 잘하더라.

모닝커피가 필수인 점은 사실이다. 커피라도 없으면 매일같이 파김치가 되어 버리는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모델 같은 남자 직원들? 가끔은 본다. 디자이너들은 남 여 할 것 없이 외모를 가꾸는 데에 공을 들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대체로 유명 피부과는 기본이고 성형외과에 대한 정보력도 대단하다.

그런데 먼지 한 톨 없는 깔끔한 사무실, 가장 신기한 게 이 부분이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디자인실은 정말 빛이 날 정도로 깔끔하다. 옷을 하는 사람들의 방에 옷이 걸려있는 행거도 없이 놀랍도록 깨끗하다.

현실 속 디자인실은 빽빽하게 걸려있는 수십 개의 옷 행거와 각종 소재 더미 때문에 공기 청정기가 없으면 휘날리는 먼지를 감당할 수가 없다. 옷과 소재뿐이겠는가. 부자재 박스, 오래된 작업 지지서와 각종 컨펌 기록 파일, 콘셉트 맵판, 기타의 잡동사니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하고 지저분한 공간이 바로 디자인실이다. 안타깝게도 소재와 옷에서 휘날리는 먼지로 비염, 축농증, 직업성 천식 등 기관지 쪽으로 직업병에 걸리는 디자이너들도 상당하다. 대학 때까지 잔 병 하나 없이 건강하던 나는 이 직업을 가진 지 10년 차 되던 해에 병원에서 ‘직업성 천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사무실 안에 민들레 씨처럼 휘날리는 먼지를 몇 년 동안 연일 들이마시다 보니 폐 쪽에 그만 지병을 얻게 된 것이다. 요즘은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보지만 패션회사에서는 사무실 내에서도 마스크를 종일 쓰고 있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다섯 시 무렵의 퇴근? 퇴근 시간이 여섯 시 이전인 회사를 본 적도 없을뿐더러 글쎄, 패션 디자이너에게 정시 퇴근이라는 개념은 없다. 우리는 야근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야근이 의식과 몸에 밴 사람들이다.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저녁에 우아하게 레스토랑과 칵테일 바를 가기보다는 고기 집에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2차로 소주방이나 노래방에 가서 얼큰하게 한껏 취하다가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가는 점은 여느 회사와 다를 바가 없다. 집에 돌아가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베어든 술 담배냄새를 걷어낼 여력도 없이 침대로 직행한다. 우리도 한국인인지라 지극히 한국적인 문화를 향유(?)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 회사 직원보다 더 대단하다고 꼽을 수 있는 점은 매일같이 야근을 하면서도 강도 높은 회식까지 다 소화해 낸다는 사실이다. 모두들 비타민 주사나 마늘주 사라도 맞고 출근하는지 몰라도 직급이 올라갈수록 내공이 쌓이는 이들의 체력과 정신력은 마치 단단하고 튼튼해진 수컷 흑소와도 같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강도 높은 업무와 야근은 일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황폐화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사람이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업무 분위기를 감내하다가 성격파탄으로 이어지는 사람도 많다. 나는 지금까지 일해 오면서 디자이너 간부급들 중에 온화하고 인성 좋은 사람은 고사하고 ‘정상적인’ 범주의 평범한 인성을 갖춘 사람조차 만나기 힘들었다. 이들은 정서적인 불안정함을 부하 직원에게 폭언과 히스테리로 푸는 경우가 많다.


패션 업계에서는 ‘매출이 곧 인격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통용된다. 그만큼 디자인 부서장은 매출실적에 대한 압박감과 함께 과도한 업무의 중압감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문제는 이것이 때로는 비뚤어진 방식으로 부하 직원에게 표출되기 쉽다는 점이다. 철저한 상명하복 식의 조직 구조와 시스템은 실장에게 모든 책임감을 일임하는 대신, 팀 내의 막강한 권력도 함께 부여한다. 부하직원의 생사여탈의 전권을 쥐고 있는 실장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부하 직원에게 표출하기 아주 쉬운 환경 안에 놓여 있는 셈이다. 당하는 부하직원은 퇴사하거나 타 회사로 이직하는 방법밖에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타 분야의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회사에서는 팀워크 team work 이 좋지 않을 경우, 팀원을 타 부서로 배치하거나 다른 조정 장치를 가동하여 팀 내의 볼화를 조정하고 중재하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그러나 패션회사의 디자이너는, 회사 조직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업무의 전문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디자인팀 외에 다른 부서로 이동하기도 힘들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포기하고 갑자기 생산 팀에 합류하여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간혹 회사 안의 타 브랜드로 이동하는 경우는 있으나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이고 팀 내의 불화가 생길 경우 열이면 열, 직급이 낮은 디자이너가 퇴사를 하거나 타 회사로 이직하고 만다. 흔히 얘기하는 ‘사이코 중에서도 개 사이코’라고 칭하는 신경질적인 상사들,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독특하고 무서운 캐릭터가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패션계에 입문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한 디자이너들의 이직률은 타 직종에 비해 높은 편이다. 한 회사에서 1년을 넘으면 근태 면에서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는 지경이니 이직이 얼마나 잦은 직업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직할 회사를 정해놓고 퇴사를 하면 좋지만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갑자기 퇴사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사실 더 많다. 이럴 경우 권고 퇴사보다는 자의 퇴사로 처리되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지원받지 못하는 채로 실업자 상태에 놓이게 된다. 다른 회사에 취업이 될 때까지 공백 기간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자의 퇴사자’로 분류되는 실업자를 위한 복지정책이 없는 한국에서 이들은 무급의 실업상태로 이 기간을 버텨 내야 한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무직 상태가 잦아지게 되어 재정은 점점 악화된다. 이직률이 많은 직업을 가진 우리의 생활은 항상 불안정하다. 미래에 대한 준비와 계획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에서 살아남는 서바이벌 게임을 매일 하고 있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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