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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상대의 달인

by 이라IRA

-에피소드


S의 일주일 스케줄은 다음과 같다.



월요일


품평 관련 리뷰 회의가 있다. 품평이 디자이너들이 다음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샘플을 모두 모아 전 부서와 매장의 매니저에게 평가를 받는 ‘컨벤션’이라면 리뷰는 이 평가를 토대로 샘플들 중 진짜 상품으로 진행할 스타일을 최종 확정 짓는 작업이다. 보통 디자인팀과 기획팀, 영업팀의 세 부서가 리뷰 회의에 참석한다.

S는 리뷰 회의 전에 자신이 디자인하고 만든 샘플들을 정리한다. 각 샘플이 받은 평가점수를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샘플 위에 표시하고 디자인 실장과 함께 높은 점수를 받은 샘플 위주로 상품 확정을 희망하는 스타일을 점지해 둔다.


“P실장, 이 옷은 올해 판매 데이터로 보자면 내년에도 진행하기 위험한 스타일이에요.”

디자인팀에서 메인 진행으로 밀고자 하는 S의 아우터 디자인을 두고 기획팀으로부터 태클이 들어왔다.

“지금은 이 스타일이 생소하게 와 닿을 수 있지만 여섯 달 뒤 상품으로 출시될 때쯤에는 대중에게 좀 더 익숙하게 와 닿을 수 있는 스타일입니다. 저희 디자인팀에서는 꼭 진행해야 한다고 보고 있어요. ”

디자인팀의 P 실장은 타 부서의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진땀을 뺀다.

“ 난 저 스타일 판매성이 있을지 정말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때?”

기획팀 부서장인 L부장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디자인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한다.

‘내가 한 옷이 싫은 건 당신 개인 취향이지..’

S는 기획팀의 부서장을 티 안 나게 흘겨보며 속으로 볼멘소리를 해 본다. 시장 동향에 대한 정보력은 디자이너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면서도, 디자인팀 의견에 계속 태클을 걸고 있는 기획팀 부장이 S는 밉기만 하다. 다음 시즌의 상품을 기획할 때 기획팀이 과거와 현재의 판매 데이터를 가장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브랜드의 MD들은 트렌드를 읽어내는 능력이 너무나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기획팀도 다음 상품을 구성하려면 판매 데이터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디자이너 못지않게 시장조사를 해야만 할텐데 그들은 도통 책상 앞에서 꿈쩍하려 하지 않는다. S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삐죽 내민다. S는 매 시즌 패션 트렌드에 무지한 기획팀과 영업팀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디자인을 어필하고 설득해야만 하는 일이 때로는 무척이나 피곤하게느껴진다.




화요일


소재 상담을 위한 업체 미팅이 있다. 좋은 소재를 최대한 저렴한 가격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여러 업체의 사람들과 장시간의 상담을 해야 하는 날이다. 최대한 다양한 소재를 보기 위하여 디자인 팀에서 아예 협력업체 사무실을 방문하기도 한다. 각 업체들의 담당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차를 마시고 간단한 얘기를 나누면서 본격적인 업무 얘기에 돌입한다.



수요일


원가절감을 위한 생산팀과의 원가 회의가 있다.

“S 씨, 이 스타일에 이렇게 비싼 소재를 꼭 써야 하나요? 원가가 오버돼서 배수가 안 나와요. 우리는 판매가 대비 4.5 배수는 나와야 하는데 이건 4배 수도 못 나오게 생겼단 말이에요. 대체 감을 찾아볼 수 없어요?”

생산부서의 K과장이 목표 배수의 이익에 미달할 것 같은 스타일에 대하여 S와 디자인팀에 소재 퀄리티 quality 조정을 요청한다.

“이 소재 퀄리티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보다 더 떨어지는 소재를 쓰자고요? 옷이 완전 싸구려처럼 보일 텐데 그렇게는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제 생각에는 생산팀에서 가격 네고를 좀 더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


생산팀은 원가절감에 주력하고 디자인팀은 옷의 품질에 더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원부자재 결정 과정에서 크고 작은 마찰이 생긴다. 하지만 S의 눈에 K 과장은 협력업체와의 부적절하게(?) 두터운 친분을 앞세워서 왠지 업체로부터 싼 품질을 자꾸 비싼 가격으로 사주려고만 하는듯하다. S는, 자신의 디자인이 퀄리티 떨어지는 품질의 원자재로 만들어져 매장에 나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요즘 소비자들은 영리하여 상품의 퀄리티에 대한 분별력도 높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K 과장의 태도가 이번만큼은 꽤 완강하다.

“배수가 너무 안 나와요. 다른 소재 고려해주세요.”

하는 수 없이 S는 디자인팀 실장에게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수배한 소재를 보여주며 상의해 본다.

“실장님, 생산팀에서 도저히 이익 배수가 안 나온다고 하는데 이 소재로 대체하면 어떨까요?”

“이 소재는 안 돼. 최대한 기존 퀄리티에 맞춰서 더 저렴한 가격으로 알아보라고 해봐.”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설득하지 못한 S, 이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 퀄리티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싶어 진다.

S는 설득능력이 떨어지는 자신에게 자괴감마저 드려고 한다.

‘내가 이러려고 디자이너 했나.’



목요일


큐씨Q.C(Quality Control) 샘플이 무더기로 들어와서 빨리 쳐줘야 한다. S는 수요일 하루는 종일 큐씨업무만 보는 일정으로 잡고 중간중간 끼어드는 급한 업무는 짬을 내어 처리하기로 했다. 체크할 사항이 많은 아우터보다 큰 문제가 없다면 비교적 빨리 끝낼 수 있는 하의부터 모델에게 피팅을 시켜본다.

8~90년도를 연상시키는 레트로 풍이면서 허리라인을 잘록하게 잡아주는 맘 핏 mom fit. 이번 시즌부터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이 핏을 S의 브랜드에서도 시도해 보려고 한다. 개발실과 상의하여 사이즈 스펙 size spec을 정하고 협력업체에 의뢰한 뒤 도착한 맘 핏의 첫 큐씨 샘플이다. 그런데 핏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지시한 사이즈 스펙은 정확하게 나오지만 뒷시리(뒤 밑위 라인)가 엉덩이에 빨려 들어가는 듯 핏이 보기 좋지 않은 것이다. S는 개발실(패턴실)의 실장에게 엉덩이의 핏을 보여주고 개선할 방법이 없는지 상의해 본다.
“ 엉덩이 꽂혀 들어가는 게 보기 좋지 않은데 시리 각도를 좀 더 세워주실 수 있을까요?”
“ 세우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내가 보기엔 힙 사이즈를 키워줘야 할 것 같은데.”

개발실 실장은 S의 요청에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는 수정사항을 요청했다고 생각했는데 개발실 실장은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S는 최근 두어달 동안 바쁘고 정신 없는 탓에 그에게 샘플 옷가지를 챙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사이즈는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데요. 방법이 없나요 실장님? ”
“ 에이, 원래 이런 핏은 조금씩 다 이래.”
“ 엉덩이가 먹은 바지를 누가 사겠어요.”

씩씩거리며 개발실을 나선 S는 샘플실에 가서 자신이 디자인한 샘플 중 몇 벌을 고이 개켜서 쇼핑백에 담아 개발실로 다시 돌아온다. 개발실을 나설 때와는 다르게 S의 얼굴은 웃음꽃이 만발해있다.

"실장님 드리려고 몇 주전에 챙겨놨던 건데, 깜빡하고 못드렸지 뭐예요?"

비교적 완성도가 좋아보이는 샘플 몇 장을 받아든 실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우고 S에게 얘기한다.

"아까 그 맘 핏, 다시 가져와봐."



- 작가의 생각


문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S의 업무 중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었는가?

정답은 'NO‘. 패션 디자이너의 모든 일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의 의논, 협의를 거쳐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의류회사의 시스템은 모든 부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업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게 만들어져 있다. 인사 총무과를 제외한 의류회사 내의 모든 부서는 의류회사의 두뇌역할을 하는 디자인팀과 긴밀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패션 디자이너는 혼자서 조용히 일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거의 모든 부서의 사람들과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해야만 하는 직업이다. 마주하는 사람들이 싫든, 좋든 각 부서의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숙명이다. 창조적인 개성을 존중받아야 하는 디자인 부서라고 해서 회사는 디자인팀의 업무 진행에 독립적인 권한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매출’과 ‘생산원가’는 의류회사의 영업이익과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므로 각 부서 간의 지속적인 의견교환과 소통이 요구된다. 디자인이 아무리 중요해도 기획팀의 판매 데이터 분석을 통한 검증절차가 필요하고 생산원가를 조금이라도 절감하여 더 많은 이익창출을 위한 생산 팀의 역할도 중요해진다. 소비자의 니즈needs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 또한 중요하므로 영업팀에서는 상품의 판매현장인 각 매장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기획과 디자인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듯 디자이너는 회사 내의 모든 부서와 협업하고 타 부서의 팀원들과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해야 하므로 사내 인간관계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인간관계가 친밀하고 좋을수록 일을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느 한 부서라도 불편한 관계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업무 진행을 하는 데에 있어 매번 걸림돌이 된다.

회사 사람들뿐이겠는가. 메인 상품을 제작하고 샘플을 만들어 주는 협력 업체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들에게 사교성과 친화력은 업무상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술이다. 예술가의 기질을 갖춘 까칠한 패션 디자이너가 디자인실에서 고요하고 우아하게 그림만 그리다 가는 장면을 상상한다면 오산이라는 말씀.

‘상업 패션’이라는 분야는 서로 얽히고설켜 진행하는 ‘협업’이 대부분이다. 품평 기간에 디자이너들이 샘플을 디자인하는 순간만큼은 디자인팀의 독립성과 고유권한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품평을 마친 후 매장에 나갈 샘플을 상품화시키는 과정은 모든 부서가 얼굴을 마주하고 협의하면서 이루어진다. 캐주얼 브랜드의 경우 품평 준비 기간이 평균 2달, 품평이 끝나고 옷이 매장에 나오기까지의 ‘메인 진행 기간’은 5~7개월이다. 이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항은, 디자이너는 혼자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보다 타 부서의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일해야 하는 시간의 비중이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자신의 역량 하에 이루어지는 ‘디자인’이라는 업무도 사실상 디자인 실장의 컨펌을 통해야만 결정될 수 있으니, 오롯이 디자이너 혼자만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하나도 없다고 얘기해야 맞겠다. 이렇게 결론 내리고 나니 슬프지만, 자신만의 세계와 개성이 강한 인간형이 자신의 창의적인 재능과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고민하면서 패션 디자이너를 택한다면 이것은 한 개인에게 큰 재앙이 될 것이다.

사람 대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그럼 디자이너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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