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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정치

디자이너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 '사내정치'

by 이라IRA


- 에피소드


S는 감기 기운이 있는지 오늘따라 몸이 으슬으슬 추워온다. 오늘만큼은 빨리 퇴근하고 싶지만 실장이 30분 전부터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다. 자리에 가방이 아직 놓여있는 걸 보면 실장은 분명 퇴근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평상시 행동 패턴으로 가늠해 보건대, 아마 사내에 있는 피트니스 클럽에 갔을 가능성이 크다. 디자인실의 팀장을 포함하여 디자이너 다섯 명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업무를 수행 중이다. 1년 중 아주 가끔씩만 찾아오는 황금과도 같은 비수기, 다른 때에 비하면 업무량도 적고 꽤나 한가한 편이지만 팀장을 포함하여 다른 디자이너들 모두 좀처럼 퇴근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실장이 퇴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실장이 디자인실로 돌아오기만을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J에게서 카톡이 왔다. 안 그래도 무료한 시간을 때울 겸 S는 저녁식사라도 생각해봤지만 오늘만은 그러고 싶지 않다. 저녁이고 자시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지만 아픈 몸이더라도 죽을 정도는 아니니 소심한 성격의 S는 일단은 자리를 지키고 있기로 한다.

S의 건너편 자리에 있는 Y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녀는 디자인실 내에서 디자인팀 중간관리자인 팀장과 부서장인 실장, 두 사람 모두와 두터운 친분을 과시하기로 유명하다.


Y의 별명은 다른 동료들 사이에서 ‘패션 테러리스트’이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 있는 모습이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로 그녀의 패션 감각은 형편없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눈치와 센스도 디자이너에게 매우 중요한 자질(?)이지만 첫 번째로 쳐주는 재능이 패션에 대한 감각과 센스이다. 그러나 패션에 대해서는 스타일 센스도 컬러 감각도 촌스럽기 짝이 없는 Y는 신기하게도 상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염둥이’ 부하직원이었다. 남들에게는 없거나 부족한 천부적인 재능이자 강력한 무기를 Y는 하나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아첨하는 능력, 이것 하나로 그녀가 실장에게 제시하는 말도 안 되는 스타일과 디자인은 놀랍게도 빠른 속도로 컨펌이 되었다.


“패턴 배우러 2년간 일본 유학 갔다 왔어.”

항상 Y가 으스대면서 전면으로 내세우는 자신의 스펙이지만 그럴 거면 패터너나 될 것이지 어울리지도 않는 디자이너가 되어 한 브랜드의 옷 스타일을 다 망쳐놓을 건 또 뭐란 말인가. S와 동료들의 눈에 그녀는 얄밉기 짝이 없는 미꾸라지였다.

Y의 우선순위 관심사는 패션도, 업무도 아니다. 팀장과 실장의 취향을 비롯하여 그녀들의 소소한 가정사와 주변 인물들의 근황이 바로 그녀의 첫 번째 관심사이다. 그녀가 온갖 신경을 쏟는 1순위는 윗사람의 개인사, 바로 그것이다.

“유진이 (실장님 딸 이름) 올해 학교 들어가는 기념으로 필통 하나 샀어요.”

실장의 가족까지 알뜰하게 챙기는 Y를 대적할만한 디자이너는 없다. 상사들의 개인 신상을 모두 파악하고 입 안의 혀처럼 비위를 맞춰주는 Y에게 누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사실상 가장 집중해야 할 디자인 업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2차적인 것이 된다. 허접한 디자인을 들고가도 Y의 모든 컨펌 과정은 매끄럽고 순조롭기 때문이다. 그녀는 디자인팀 내에서 가장 스피드 있게 일하는,능력 좋은 디자이너로 평가받는다.


Y도 나름의 고충이 만만치 않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상대방의 소소한 사생활까지 다 파악해야 한다. 윗사람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자세로 보좌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디자인을 잘해서 실적을 높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Y는 주장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칭 실장의 ‘수석 비서관’이라고 정하기로 한 그녀는 아무리 바빠도 실장과 팀장이 주도하는 술자리에 끼고 다음날 상사의 자리에 숙취 해소 음료까지 살포시 올려놓는 예쁜 짓을 해 댄다. 그뿐인가. 점심식사 때엔 해장할 음식점을 예약해 놓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그녀는 실장의 상반신은 열이 많고 하반신은 차갑다는 어느 한의원의 진단 결과를 유심히 듣고는 겨울에는 디자인실을 너무 덥지 않게 유지하되 실장의 하체열을 보존해 주기 위하여 기모 레깅스와 방석을 선물하는 등의,실장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남들보다 몇배로 고군분투한다. 생전 자신의 부모에게는 쏟지 않던 배려와 정성을 회사의 상사에게는 아낌없이 쏟는 것이다. Y는 실장이 자신을 1등 부하 직원이자 베프도 저리 가라 할 만한 소울 메이트로 착각하게 만드는 데에 결국 성공한다. 단지 자신의 직장생활을 순탄케 하고자 행하는 철저히 계산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Y의 탁월한 연기력과 노오력은 상사의 눈과 귀를 멀게 한다.


“쟤 너무 여우인 듯싶은데, 실장님 적당히 걸러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이 조심스러운 충고를 던지지만 실장은 들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디자인 팀의 전권을 가진 실장의 오른팔이 된 Y는 윗사람인 디자인 팀장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그녀는 정작 신경 써야 할 본인의 주된 업무를 소홀히 해도 무탈하다. 다른 동료 디자이너에 비해서 업무량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혜택 또한 누릴 수 있다. 남은 업무량은 S와 주변 동료 디자이너들에게 떠넘겨진다. 원성과 미움을 살 소지가 있으나 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것보다는 상사에게 잘 보이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Y는 동료들에게 철면피로 일관하는 쪽을 택했다. 이것은 디자이너 세계에서 살아남는 그녀 나름의 방식이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내부의 업무 진행이 100% 상사의 컨펌을 통해서만 가능한 디자인 팀은 상사의 존재가 ‘갑 오브 더 갑’이다. 그러므로 디자인 실장의 환심을 사는 것만으로도 그 디자이너는 인사평가 면에서 80점을 미리 얻고 시작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디자인실 내부에서는 막장 사극 따위에서나 볼 수 있는, 피 튀기는 ‘암투’가 펼쳐지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실장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 디자이너는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가 되어 팀원들 위에서 군림할 수 있다. 여자들 사이에서 서열과 권력구조가 생기면 남자보다 더 살벌하다는 점을 아는지? 감정적으로 더 치열한 공방이 오가지만 이것이 겉으로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은 채 물 밑에서만 벌어지는 전쟁, 웬만한 스릴러보다 더 쫄깃하고 공포스럽다. 여자들만 있는 세계에서 오랜 기간 사회생활을 했던 여자라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아주 피를 말리다 못해 온 신경이 닳아서 없어져 버리는 느낌, 조용한 살인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식 문화의 하나인 품의 제도는 최첨단을 달려야 할 패션 디자이너의 세계에서 업무 플로어 flow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시스템이다. 아무리 개인의 감각과 역량이 뛰어나다고 해도 상사의 눈 밖에 나는 순간 그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 패션 디자이너도 예외는 없을뿐더러 이 끔찍한 부작용의 최전방에 있는 직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내성적이고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이라 팀장이 되기 전 담당 디자이너 시절의 오랜 기간 동안 매우 고생스러웠다는 점을 고백한다. 자신의 일만 성실하고 묵묵하게 잘해도 플러스알파(충성과 아첨)가 없는 이상, 한국의 조직 생활을 원활하게 해 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 듯싶다. 사회생활에 뛰어들기 전부터 한국 조직 문화의 이러한 점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패션 분야에서만큼은 개개인의 개성과 독립성을 우선시하고 보장해주는 분위기일 줄 알았다. 그러나 디자이너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보니,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는 않았다. 서열주의와 권위주의 면에서 만큼은 타분야보다도 심화학습(?)을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사내 정치에 집착하는 이들은 자신의 업무 실력의 부족한 부분을 다른 수단으로 커버하려고 발버둥 치는 부류이다. 이런 사람들은 직급에서 어느 레벨까지는 올라갈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볼 때 대부분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앞 서 패션계에서는 ‘매출이 인격이다’라는 신념이 통용된다고 했었다. 다행히도 패션계에서는 ‘매출’이라는 실적이 따라다닌다. 이 객관적인 지표 앞에서는 아무리 탁월한 ‘사내정치가’ 라도 언젠가는 속 빈 강정이라는 정체가 탄로 나게 마련이다. 결국 실력과 감각, 그리고 일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만이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는 저력이 된다. 실적이 결국 사람을 가려준다는 점은 이 직업이 가진 몇 안 되는(?) 매력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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