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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디자이너? 아니, 품질 디자이너!

by 이라IRA

- 에피소드


S는 옷을 좋아하고 쇼핑이 취미여서 디자이너가 되었다. 실장의 멋진 PPT 발표에도 매료되었고 자신이 언젠가 그와 같은 뛰어난 언변과 발표력을 갖춘 실장이 되어 청중을 단번에 휘어잡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다. 비록 부분 혹은 전체적인 카피라 할지라도 옷을 그리고 그림이 옷이 되는 과정과 결과의 뿌듯함은 상당했다. 매일같이 트렌드에 촉각을 세우고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 자신의 외모와 패션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만큼 출근 옷차림에 하등 구속이 없다는 점, 자신의 개성과 스타일 표현의 자유에서만큼은 이 보수적인 한국사회 안에서도 제약이 없다는 점에 매료되어 이 직업을 택했다. 그러나 그녀가 몇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디자이너 생활 내내 그녀를 고문(?)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첫째, 패션디자이너는 ‘창조’ 보다는 ‘생산’에 더 많이 얽매이는 직업이다.

“이 소재 퀄리티 우리가 지정한 것과 다른데요 ?”

“이 스타일 납기 기한이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도 Q.C가 안 오면 어떡하나요?”

“Q.C샘플을 이렇게 걸레같이 만들고 우리더러 빨리 컨펌하라니 말도 안돼!”

“상동사이즈 2Cm 키우고 소매산은 좀더 낮출까?”

“이 소재 워싱하면서 원단 스판사가 다 터져서 워싱을 바꿔야 하게 생겼어요, 아니면 원단을 다시 짜든가..”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Q.C란 Quality Control의 약자로 옷의 품질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말한다. 패션디자이너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집중해야 할 일이며 이 업무로 인해 가끔 회사를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Q.C업무를 대충 했다가는 말 그대로 대충 만들어진 옷이 매장에 걸릴 것이기 때문에 매우 꼼꼼하고 세심하게 옷의 품질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해야 하는 업무이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옷 한 벌의 퀄리티를 결정짓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품평 후 한 매장에 진열된 상품을 셀렉하면 그것으로 패션디자이너의 업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디자이너 업무는 옷을 디자인하고 그림이 실물화 되는 선에서 끝나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패션디자이너들은 이때부터 사실상의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생산협력업체에 봉제를 투입시키기 전 품평샘플의 최종사이즈와 핏, 소재와 부자재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Q.C 업무를 해야 하는데 Q.C 샘플이 도착하면 디자이너는 자신의 의도대로 옷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모든 사항을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이 때 디자인팀은 생산팀과 협력업체와의 의사소통을 긴밀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긴밀하게 해도 Q.C 샘플이 한번에 제대로 만들어져 오는 경우는 드물다.

사이즈, 핏감, 옷의 모든 부위의 봉제사양, 디테일 형태, 봉사컬러, 원부자재, 워싱 사양 등 하나의 옷에서 체크하고 맞춰야 할 크고 작은 사항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물론 옷을 만드는 업체에서 이 사항을 알아서 꼼꼼하게 맞춰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디자이너 입에서 가장 많은 욕이 튀어나올 때가 바로 이 Q.C를 진행할 때이다. 작업 지시서에 요구되는 사항을 빠짐없이 100% 맞추기가 베테랑 업체일지라도 보통 꼼꼼하지 않으면 할 수 없거니와 타인이 디자이너가 갖고 있는 감성과 감각까지 완벽하게 이해하여 옷에 반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자신의 옷이 최고의 퀄리티로 매장에 나오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나온 부분이 있다면 다시 요청하고 잘못 나온 샘플은 수정하는 작업을 통해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이 과정을 컨트롤해야 한다.


Q.C에서 나오는 멘트는 증거로 남기기 위해 무조건 서류화 혹은 파일화 시켜 보관해야 하므로 한번의 Q.C가 끝나기 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하는 시간보다 Q.C 업무에 시간 할애를 더 해야 하는 셈이다. 이 Q.C라는 것은 사실 디자이너의 ‘창조적인’ 업무보다는 ‘생산관리’ 쪽과 더 가깝다.(그래서 나는 Q.C업무가 정말 싫다.)


예전에 어떤 기사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종에 대한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스트레스 고 위험군에 생산 관련 업무를 하는 직종이 위치하고 있는 그림을 보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바로 이 생산 업무에 디자이너의 온 에너지를 열정적으로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옷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옷을 생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일까지 사랑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 옷을 디자인하는 일과 옷 생산관련 업무에 디테일하게 관여해야 하는 일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두 업무를 선진국에서는 별도의 팀을 만들어 분리를 해주고 있다. 디자이너의 성향과 개성을 존중해주는 배려인 것 같아 부럽기도 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내의 거의 모든 패션회사에서는 인건비 절약을 위해 두 업무를 굳이 분리시키지 않는다.

‘난 디자인만 하는 줄 알고 디자이너가 된 건데, 디자이너에게 디자이너 일만을 시키지는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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