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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 체력

by 이라IRA

- 에피소드 1.


“나는 일 잘하면서 빨리 퇴근하는 애들보다 일 못해도 야근하는 애들이 더 예쁘더라.”

S가 일하는 곳의 K사 대표는 어찌나 쿨하고 솔직한지,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절대 안에만 담아두지 못하는 성정이다. 그러다보니 가끔 이렇게 그의 여린(?) 심경을 솔직 담백하게 직원들에게 털어놓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직원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기묘한 표정을 짓고 서있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단언컨대, 패션디자이너의 실장이나 디렉터가 될 수 있는 자질에는 체력이 50% 이상이다. 실력, 인성, 빠른 두뇌 회전, 이런 것들, 체력 앞에서는 다 소용없다.

물론 체력 안에는 ‘눈치’ 와 ‘사내정치’가 포함되어 있다. 상사와 대표에게 잘 보이려면 절대 그들이 퇴근하기 전까지 섣부르게 먼저 일어서서 사무실 문을 나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 안에서라면 다른 업종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패션회사는 특히나 구시대의 모든 체계 (악습은 더더욱)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서열주의, 품의제도, 조직 안에서 개인의 자유와 개성은 무시되는 전체주의의 모든 것이 누구보다 최첨단을 달리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패션회사에서 오히려 가장 잘 고수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보통 대표는, 혹은 자기가 대표인 줄 아는 많은 디렉터들은 정시에 출근하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여겨지는지, 다른 성실한 직원들이 출근하는 시간보다 2~3시간 늦게, 혹은 반나절이 다 지나서야 슬슬 출근들을 한다. 그리고는 퇴근시간이 되면 집에 가지 않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퇴근시간이 되면 회사가 집처럼 느껴지는지 그 안에서 먹고 놀고 잠이라도 잘 기세로 버틴 채, 좀처럼 집에 갈 생각들을 하지 않는다. 부하직원이 알아서 퇴근하는 분위기를 장려해 준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들의 마음 속 깊이 ‘권위주의’라는 것이 박혀 있어 부하직원이 자신보다 먼저 일어서는 것은 또 달가워하지 않는다. 사실, 윗세대의 문화를 답습한 나도 그러기는 마찬가지이다. 디자이너 디렉터를 꿈꾸는 디자이너라면 상사가 몇 시에 퇴근을 하든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 현명하다.



- 에피소드 2


“오늘은 샘플실 정리 좀 하자. 더 이상 필요 없는 샘플은 개켜서 박스에 담고 박스는 차곡차곡 쌓아둬서 나중에 처분하도록.”

“소재 스와치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으니 소재별로 분류해서 수납장에 보관하자.”

“이번 품평은 쇼 형식으로 하기로 했으니 마네킹과 모든 행거는 쇼장으로 전부 이동시키고 마네킹에는 전략착장을 코디하는 걸로 하자.”

“내일 급하게 물류창고로 갈 일이 생겼다. 가서 박스 전부 뜯고 컬러별 사이즈별로 분류하는 작업 좀 도와줘야겠어.”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디자이너의 업무 중에는 생각지도 못하게 몸 쓰는 일이 많다. 무거운 행거와 옷을 들고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일은 기본이다. 거기에다 옷을 계속 사고 만들다 보니 샘플실은 금방 꽉 차서 발 디딜 공간조차 없어져 버린다. 매 시즌 소재상담을 통해 얻게 된 소재 스와치 더미 때문에 이를 수시로 정리해 주어야만 한다. 게다가 가끔 물류창고에 지원인력으로 파견되어 ‘까대기’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일명 ‘패션 막노동’이다. 디자이너는 수시로 소매를 걷어 붙이고 막노동을 한다. 예쁜 옷을 입고 풀 메이크업을 하고 힐을 신은 채로 말이다.



- 에피소드 3.


“품평 끝났으니 맛있는 것 먹으러 가야지?”

품평준비로 몇주 동안 야근에 시달렸던 디자인팀은 거의 실신 지경에 와있다. 그러나 품평이 끝나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회식이다. 철야 작업을 한 디자이너들을 회사는 배려해 주지 않는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패션회사의 회식 씬은 국내 다른 보통 회사들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고기 집에 가서 가볍게 술 몇 잔을 곁들여 고기를 구워먹고 2차가 이어진다. 2차에서는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지고 자정이 지나서는 해장술을 마시러 3차를 간다. 요즘은 노래방에 점차 가지 않는 분위기라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 들어 영화를 관람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고 1차에 깔끔하게 헤어지는 회식문화도 생겨나고 있다. 정말 ‘강추’한다.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마주앉아 술을 마셔도 친해지지 않는 사람은 계속 안 친해진다.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자. 점심에 가볍게 밥만 먹어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끈끈한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해도 다가오지 않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팀웍을 위한답시고 퇴근 이후 허구한 날 팀원, 부하직원들을 끌고 술판을 벌이기 좋아하는 상사는 정말이지 ‘진상’이다.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것을 감수하고 수시로 닥치는 막노동 판에 뛰어들기도 하면서 강도 높은 회식까지 감당하기 위해서는 디자이너에게 무쇠와도 같은 체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체력을 다질 시간이 없으면 각종 영양제라도 섭취하고 마늘, 비타민 주사라도 맞을 것을 권한다. 그래야 끝까지 버틸 수 있다. 야근과 체력, 이것이 디자이너 먹이사슬의 가장 위인 디렉터가 되는 큰 비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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