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직 패션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이제부터는 디자이너의 실무에 대하여 좀 더 디테일하게 얘기해보고자 한다. 패션회사의 디자이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길래 드라마에서 그리는 디자이너세계가 그렇게도 허구적인 판타지일 뿐인지, 있는 그대로를 얘기하고 싶다. 명품브랜드이거나 자신만의 고유 브랜드가 아닌 주변에 무수하게 깔린 상업적인 브랜드의 디자이너를 지망하고자 하는 많은 청소년들이 드라마에서 왜곡되게 그려지는 디자이너의 이미지를 보고 잘못된 진로를 선택하지 않길 바라는 노파심(?)이라고 해야겠다.
다음은 가장 잘못 호도(?)되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의 이미지 중 몇 가지이다.
패션디자이너의 주된 업무 중의 하나는 ‘패션일러스트’와 같은 그림 그리는 작업이다..?
12등신의 비현실적인 비율과 기럭지를 가진 사람의 몸 위에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패션을 입히는 그림인 패션일러스트, 이 그림을 사무실에 앉아 멋지게 그리고 있는 디자이너의 모습은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광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학교에서 실컷 그리다가 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나와 입사한 이래로 곁에서 단 한 번도 직접 본적도 해 본적도 없는 허구중의 허구이다.
- 스타일화 예시
앞에서 얘기했듯이 상업 브랜드의 디자이너는 순수 창작이라는 것은 하지 않는다. 카피디자인을 굳이 여신과 같은 인물전신화에 입히는 작업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사실, 워킹하는 모델그림인 스타일화는 상업적인 옷을 만드는 우리들에게는 무용지물이고 시간 낭비일 뿐이다.
브랜드에서 근무하는 대부분의 패션디자이너들이 그리는 그림은 스타일화가 아닌 ‘도식화’이다. 도식화란 개발팀의 패턴사와 투입공장의 봉제사들이 그림 하나만 보고도 패턴을 뜰 수 있고 봉제를 할 수 있도록 옷의 형태와 디테일, 봉제 방법 등을 최대한 자세하게, 또 규격에 맞게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여기에 굳이 사람을 넣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예술성이 개입될 필요도 없다. 봉제사항에 대한 디테일만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최대한 친절하게 알려주는 ‘그림 설명서’인 셈이다. 그리는 재주나 예술적 소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몇 번의 훈련을 거치기만 하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인 도식화는 국내 내셔널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그리는 그림의 전부이다.
도식화 예시
명품패션브랜드나 자신이 론칭launching하는 고유브랜드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순수 창작물의 패션디자인을 한다면 그때는 패션 일러스트가 필요하다. 이 그림을 ‘스타일화’라고 하는데 패션일러스트 즉, 스타일화는 옷을 구체화하기에 앞서 그 브랜드 고유의 개성과 무드의 전반적인 것을 표현하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카피하는 하위 단계인 많은 상업브랜드들이 굳이 이 스타일화를 한 번 더 따라 그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 디자이너들은 명품브랜드에서 창조한 디자인을 콕 콕 찝어 와서 패턴실과 공장에서 알기 쉽게 도식화만 잘 그려서 넘겨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많은 대학교의 패션 디자인과에서 사회에 나가면 매일 그리게 되는 이 도식화에 대한 강의를 하지 않는다. 교수님들은 모든 학생들이 몇 안 되는 명품브랜드에만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모두가 엄친아, 엄친딸이어서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본을 투입하여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도식화가 아닌 일러스트 강의에만 심혈을 쏟는다. 도식화에 대한 강의가 때때로 있긴 하지만, 내가 배웠던 도식화 강의는 실무에서 사용하는 도식화에 비교해서 정확도도 떨어졌고 엉성했다.
이유인 즉슨 패션학과 교수들 중 사회에 나와 진짜 실무를 해 본 사람들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작품과 논문으로만 학위를 얻은 교수님들은 사회에서 실무를 해야 할 예비 패션디자이너들에게 정작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모른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지금도 모든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육 현실이다. 그들 중 누구도 패션계에서 쓰이는 봉제관련사항의 거의 모든 용어가 아직까지 일본어로 쓰이고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는다. 놀랍게도 의류업계의 실무 용어 중 옷의 봉제에 관련되는 용어는 아직까지 일본어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 옷의 앞마이는 오무데가 아닌 우라로 패치하고 에리는 배색소재로 합시다.”
패션회사에서 매일 자연스럽게 주고 받는 말들이다. 70대 이상 노인들 아니고서 이 지시를 알아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앞마이=앞여밈, 오무데=옷감의 겉면, 우라=옷감이 안쪽면, 에리=카라’를 말한다.
실무의 작업지시서에는 이 밖에 와끼, 우아마이, 시다마이, 니혼바리, 미스마끼, 호시, 미까시, 뎅고, 가에루빠. 간도메, 하도메 등등의 일본어들로 도배가 되어있다. 의류봉제용어를 프로답게(?) 구사하려면 패션관련 학과 학생들은 실무자에게 일본봉제용어에 대한 과외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안 그러면 입사하여 선배들이 쏟아내는 일본어를 접하고 무척이나 당황하게 된다. 학교에서 교수님이 ‘지금 배우고 있는 많은 봉제 용어들은 회사실무에서는 모두 일본어로 바뀔 것이다’ 정도는 예고해줬다면, 사회에 나가서 처음 접하게 되는 일본어들을 고 당황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