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소드
“S씨, 그 카키 컬러 야상에 대한 부자재, 급한 건인데 빨리 컨펌해 줄 수 없어요?”
업체가 S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납기일이 촉박한 한 스타일에 대해 공장 투입을 위한 부자재 컨펌 건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협력업체의 직원은 본사의 담당 디자이너에게 독촉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S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실장님이랑 팀장님 지금 외근 중인데 오늘 직퇴하실지,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실지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어요. 직 퇴하시면 내일 결정되고 돌아오시면 오늘 늦게라도 결정해서 알려 드릴게요.”
이 말을 들은 협력업체 직원은 낙담하고 만다.
“아, 지금 당장 투입해도 늦는데.. ”
“J씨, 샘플 작업지시서 오늘 패턴실로 넘겨주겠다며, 아직 컨펌 못 받은 거예요?”
다음 스케줄에 차질이 없도록 J의 샘플 디자인을 오늘까지 개발실로 토스toss하기로 했었지만 J의 업무가 늦어지자 패턴실 과장이 디자인실로 찾아왔다.
“실장님이 갑자기 외근을 나가셔서 내일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오늘 하루 실장의 갑작스러운 외근 일정에 디자인실의 모든 업무는 일시적인 마비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협력업체에서 아무리 급하다고 발을 동동 굴러도 다른 부서의 스케줄에 차질이 와도 실장님이 부재중인 한 디자인실의 팀원들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J씨, 패턴실에 먼저 넘기고 내일 따로 결재받을 수 없어?”
“안돼요. 어느 부분이 어떻게 바뀔지 알고요? 우리 실장님 포켓 디테일 하나도 그냥 지나치시지 않는 분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
디자인의 사소한 사항 하나라도 실장의 컨펌 없이 타 부서에 넘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상품이 매장에 출고되기 전 디자인을 확정 짓고 공장에 투입하기 전, 디테일한 모든 것을 실장의 허락을 받고 진행해야 한다는 점은 디자인팀 내의 룰이다.
디자이너들은 종종 상사 없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살짝 짜증이 난다. 게다가 업체가 급하다고 사색이 된 지금의 상황을 또 못 보는 척할 수만도 없어서 S는 자신의 판단 하에 작업 진행 오더를 내렸다.
이 외에도 실장이 보고 결정을 내려주어야 할 사항은 산적해 있었다. S는 내일 실장이 오면 컨펌받을 업무를 차근차근 정리해 둔다. 샘플 스케치는 패턴실로 토스한 상태이지만 샘플에 쓰고 싶은 원자재와 원자재의 컬러, 단추와 지퍼 등의 부자재는 아직 결정 전이다. 이것까지 모두 컨펌이 끝나야 비로소 봉제공장에 샘플을 투입할 수 있기 때문에 S는 실장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을 가지런히 세팅해 놓는다.
‘내일 실장님이 오시자마자 보여드려야겠다.’
분명, 아침부터 디자이너들이 실장 앞으로 줄을 서 있을게 분명하기 때문에 치열한 눈치싸움과 함께 민첩한 행동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출근한 실장님의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기압인 표정으로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실장을 보고 담당 디자이너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S가 먼저 용기를 내어 실장에게 다가가 본다.
“실장님 어제 이 품번에 대한 부자재 진행이 급해서 제가 미리 작업 진행을 시켰어요. 제 판단으로는 메인 전 샘플에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어떠신가요?” 하며 조심스레 컨펌 시트를 내민다. 실장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말한다.
“이 스트링 컬러는 별로인 것 같은데? BO 컬러 말고 몸판 매칭 컬러로 바꿔.”
실장이 S가 내린 결정을 뒤엎고 말았다. 아, 업체는 어젯밤에 이미 작업 스타트 start를 했을 것이다. 일단 업체에 확인 전화를 건 S는 이미 반 이상이 염색이 되어 수정 불가하다는 업체의 말에 절망한다.
“아, 정말 죄송한데 그 스트링 다른 스타일에 써 줄 테니 작업 중단하고 새로 해 주실 수 없을까요?”
난데없는 이 뒤집기 오더에 협력업체는 펄쩍 뛰지만 S는 지금 저기압인 실장님의 기분을 거스르느니 차라리 협력업체에 바가지를 씌우는 쪽을 스스럼없이 택한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국내 브랜드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디자이너들은 실장을 제외하고는 디자인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없다. 옷에 들어가는 자잘한 부자재 하나까지도 말이다. 품의 제도(稟議制度)가 지배하는 조직과 사회, 한국은 아직도 여기에 머물고 있다. 첨단을 달려야 하는 패션회사 또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품의 제도란 조직 하부의 의견이 중간관리자를 거쳐 최 상부의 결재까지 받은 뒤에야 어떤 사안이 결정되는 방식에 기조를 두는 제도이다. 한 부서 내에서 전 직급에 걸쳐 의견 일치가 이루어져야만 일이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의견이 다를 경우 기안자의 의견이 최고 상부에게로 전달될 수 없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는 상부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을 갖고 하부의 실무 기안자들이 이를 대신 수행하기 위하여 결재를 받는 하향식 의사결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위에서 지시하면 아랫사람들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조직에서 쓰임새가 좋은 제도, 한 마디로 말해 비민주적인 제도이다. 오래전부터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한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회사가 더없이 비민주적인 이것을 오랫동안 통상화 시켜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창의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겨야 할 패션회사에서 품의제도를 가장 적극적으로 애용하고 있다. 담당 실무자의 독창적인 의견은 국내 어느 곳에서든 단독으로 실현되지 못한다. 팀원의 디자인은 예외 없이 중관 관리자인 팀장과 실장의 컨펌 과정을 거쳐 픽스된다. 실장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디자인을 아래 팀원이 형상화 작업하기도 한다. 차라리 이 방법이 업무 속도에서는 효율적이기 때문에 실장 한 명이 경력 연수가 짧은 어린 디자이너들만 데리고 일하는 팀도 있다.
디자인팀에서 나오는 모든 디자인의 결정권은 부서장에게만 있는 셈이다. 아무리 연차가 높은 베테랑 디자이너라도 실장에게 디자인 컨펌을 받아야 할 의무에는 예외는 없다. 때문에 시즌 품평은 사실 디자인팀 실장 한 사람만의 품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참신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디자인이 나온다고 한들 실장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바로 사장되어버리고 마는 슬픈 현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각 담당 디자이너들의 독립적인 개성과 창의성이 반영되는 시스템이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 텐데도 국내 패션회사들이 모두 품의 제도를 고수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패션업계는 창의성보다는 업무의 스피드와 효율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있는 것 같다. '창의성‘과 ’ 혁신‘이 무엇보다 강조되고 있는 이 시대에도 말이다.
품의 제도는 각 담당 디자이너들의 일하고자 하는 의욕을 상당히 떨어트리는 결정적인 부작용이 있다. 디자인을 매번 팀장과 실장에게 설득시키고 컨펌을 받아내야 하는 과정이 종종 힘들고 짜증스럽게 느껴진다. 지금은 부서장 위치인지라 내가 하고 싶은 모든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확히 얘기하자면 팀원들에게 시킬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이 윗사람의 취향을 거스르겠다 싶으면 스스로 미리 포기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로 의견이 다를 경우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는 화술이나 재치가 부족하다면 이 과정은 디자이너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만약 상사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미움을 사고 있는 디자이너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참신하고 좋은 디자인을 낼 지라도 그의 디자인이 현실에서 형상화될 가능성은 0%이다. 아니, 그 디자이너는 그 팀에서 근무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다. 디자인 실장은 디자인 부서의 전권을 쥐고 있는 셈이므로 그 권력 또한 디자인 팀 내에서는 무소불휘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주관적인 것이다. 제 눈에 예뻐 보이면 만들고 싶은 것이 디자이너 마음인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팀장, 실장의 줄줄이 이어지는 컨펌 라인은 담당 디자이너가 창의력을 발휘하는 데에 큰 장벽이 될 수 있다. 후진적인 제도 안에서는 어떤 참신한 생각도 매몰되기 쉽다. 이는 비단 패션계뿐만은 아닐 것이다. 품의 제도는 한국의 전반적인 기업문화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이것을 버리지 않는 한 한국이 현재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혁신’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