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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Jan 23. 2021

일확천금과 얻을수 없는 사랑에 대한 매력

인생소설 '위대한 유산'리뷰

  지극히 평범하게 사는 당신에게 정체 모를 누군가가 평생을 놀아도 부족하지 않을 유산을 물려준다면 어떠한 기분이겠는가? 나라면 로또 맞은 심장보다 더 벌렁거려서 수명이 크게 단축될지도 모른다. 로또는 평생 놀면서 쓰기에는 약간 부족하잖아? 책 제목의 한국어 번역을 처음엔 ‘막대한 유산’이라고 정하려고 했었던 이 책은 설정과 소재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구미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하다.


 물질적인 풍요와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 속세에 사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이 보편적인 욕망을 소설은 스토리 초반에 보란 듯이 해소시켜 준다. 마치 한방의 홈런을 선사하듯이.

 ‘위대한 유산’은 대장장이 밑에서 자라나는 사회 하층민이었던 어린 주인공 핍이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고 하루아침에 신분상승을 하면서 전개되는 스토리이다. 장장 900페이지에 달하는 길고 긴 장편 소설이지만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한 데다 아스라하고 먹먹한 감동까지 더해져 마지막 날에는 밤을 새 가면서 다 읽었다. 예전에 현대를 배경으로 리메이크된 영화를 먼저 봐서 대강의 스토리는 알고 읽었으나 그냥 영화감상으로만 끝났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위대한 유산’은 내게 인생소설이다.      

 

영화 '위대한 유산'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핍과 에스텔러의 러브 라인에 중점을 두며 전개되는데 난 사실 이 이해할 수 없는 러브라인만으로도 영화를 볼 당시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영화에서 냉 온탕을 왔다갔다, 죽 끓는 듯한 변덕을 일삼으면서 핍을 희롱하고 괴롭혔던 이해할 수 없는 에스텔러를 소설 속 성장과정을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식날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철저하게 사기 당해 반쯤 미쳐버린 헤비셤, 그녀의 양녀로 살면서 에스텔러는 복수의 도구로 길러진다. 이 설정도 참 재미있다. 문제는 이 복수심을 옛 연인이 아닌 세상 모든 남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지. 헤비셤의 불타오르는 복수심의 도구로서 로봇같이 차가운 존재로 훈련된 에스텔러가 하필 또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게 이 작품의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흠.. 영화에서는 사실 소설의 핵심인 ‘유산’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이러한 설정이 대부분의 스토리를 이끌어나가고 모든 분위기를 지배한다. 핍과 에스텔러의 러브라인은 소설에서도 상당히 비중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소설에서는 더 중요하고 굵직한 것이 있다. (그러나 영화도 나쁘진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기네스 펠트로가 에스텔러 역을 해줘서..)     


                                    영화 '위대한 유산'의 에스텔러 역 기네스 펠트로 출처: 네이버 영화


   원작을 읽어보니 영화에서 기네스 펠트로는 에스텔러 역을 하기에 너무 따뜻한 이미지였다는 걸 알아버렸다. (영화 속에서도 꽤나 얼음장 같이 나왔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소설의 에스텔러는 소름끼치도록 차갑고, 놀랍도록 거만하고, 아주 못 되 쳐 먹은(?) 인물.. 그러나 주인공인 핍은 그녀를 처음 봤던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줄곧 사랑하며 사는 불행을 짊어진다는 점이 또 재미있는 부분이다. 사랑은 원래 그런 건가? 비이성적이고 불가해하고 맹목적인.. 너무 오래 되어서 잊어버렸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사실 전적으로 이해한다.     

 찰스디킨스는 물론 이 불가해한 사랑만을 말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소설은 순수하고 착했던 핍이 예상치 못했던 막대한 재산을 갖게 되면서 변해가는 모습에 더 집중한다. 자신의 가난했던 과거를 창피해 하고 소중했던 사람들을 버리는 과정, 지나친 사치와 무가치한 사교계 활동을 통해 그가 점점 겉치레에만 집중하는 속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작가는 천천히, 그리고 약간의 풍자를 섞어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19세기 당시 ‘신사’라고 칭해졌던 영국의 부르주아 계급의 허상을 풍자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한다. 물질적인 부와 함께 교양과 학식은 물론이고 가장 중요한 인격을 갖춰야지만 진정한 신사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당시 사회에서 신사였던 자들의 대부분의 실상은 물질적인 부만을 과시하면서 ‘신사 흉내’에만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작가는 이 사실을 꼬집고 싶었던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21세기인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으니 이 소설이 지금까지 공감을 얻으며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이와 대조적으로 처음엔 천하고 더럽고 무섭기만 했던 죄수 매그위치가 소설 후반에서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가장 따뜻하고 정이 가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는 점도  재미있다. 부모를 잃은 가난한 고아가 당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얼마나 쉽게 좋지 않은 길로 들어설 수 있는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얼마나 쉽게 상습범이 될 수 있는지 등은 비슷한 시기에 쓰였던 ‘레미제라블’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소설 후반에 매그위치가 위험에 빠지고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매그위치, 사랑한다. 소설 초반에 잠깐 나오고 말 것이라 생각했던 죄수 매그위치는 주인공인 핍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들은 이렇듯 모두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어느 한명이라도 소홀하거나 허투루 다루는 법이 없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읽으면서 계속 놀라고 연신 충격적이었고 끝까지 흥미진진했다.     

     

         영화 '위대한 유산' 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소설의 분량이 워낙 방대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스토리 또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므로 스포를 남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사와 죄수’, 혹은 ‘열정적인 사랑과 영혼을 잃어버린 차가움’과 같은 극과 극의 대조가 소설을 한층 더 재미있게 만들었던 설정이라는 점은 얘기하고 싶다.

 그리고 찰스 디킨스의 톡톡 튀는 유머감각과 해학, 책을 읽으면서 내내 웃음을 연발하게 했다. 찰스 디킨스 같은 남자와 살면 인생이 절대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그런 힘이 있는 것 같다. 많은 세월이 지나도 죽은 저자와 마치 생생한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매력.


 시간을 갖고 한번 더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나의 인생소설. 고전은 괜히 고전이 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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