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퀴어(동성애) 소설 '티핑 더 벨벳'
나 자신에게 솔직한 인생에 대하여
한국인에게 너무도 유명한 영화 ‘아가씨’의 원작 ‘핑거스미스’를 쓴 작가 세라 워터스의 퀴어 소설. 핑거스미스가 페미니즘인 듯 퀴어물이었 듯, 이 작품 역시 동성애를 다룬 소설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첫 출간으로 하여 단번에 스타 작가로 부상했다고 한다. (세상 부럽.)
무엇보다 이 작품의 흡인력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이 소설이 얼마만큼 사람을 잡아끄는가 하면, 동성애자가 전혀 아닌 내가 소설의 1부를 읽으면서 묘하게 설레발 치고 요동치는 심장 때문에 잠을 못 잤다는 거다.
나는 낸시의 손에 입을 맞추는 키티를 보며 낸시와 같이 가슴이 두근거렸고 키티가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했을 때 온 세상을 가진 듯 했다. 그러나 낸시와 키티와의 사랑이 비극을 맞았을 때에는 그 동안 쌓아올렸던 아름다운 세상이 처참히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나는 주인공 낸시에게 거의 빙의된 수준으로 완전하게 몰입한 채 소설을 읽어나갔다.
“진주는 눈물을 상징하잖아!” 낸시가 키티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했던 진주 목걸이를 두고 이토록 뻔한 복선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나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둘의 사랑이 파국을 맞게 되리라는 걸 일찌감치 눈치를 챌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렇게 되었을 때 나는 낸시와 함께 꼭지가 돌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1부는 이렇게 풋풋한 설렘과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키티를 잃고 나서 시작되는 2부는 영혼을 잃은 낸시의 막 가는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갈 데까지 가는 성적 쾌락, 혹은 아무 쾌락도 없는 매춘, 문장 속에 난무하는 온갖 상스러운 표현과 어휘들로 도배가 되어 있는 2부를 난 너무도 힘들게, 꾸역꾸역 읽어 나갔다. (하지만 성적 표현에서 높은 수위를 기대하고 읽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흥미진진할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가는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는지, 1부에서 그토록 빙의까지 해가며 감정이입을 했던 낸시가 2부에서는 완전히 낯설게 느껴졌다. 이건 아니잖아.. 난 계속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큰 실연을 당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스스로를 가혹한 노동으로 몰아넣으면서 몸을 혹사시키는 방법과 다른 한 가지는 사랑 없는 쾌락에 몰두하는 것. 둘 다 생각하지 않으려는, 생각하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성 소수자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인생을 살 때 치러야 하는 대가란 지금도 잔인하리만큼 심한데 예전에는 오죽했을까. (티핑 더 벨벳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워 비겁한 삶을 택했던 키티와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살았던 낸시 중 누가 덜 불행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서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죽는 순간만큼은 자신에게 솔직했던 인생에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이 세상이 (특히, 한국은 더 ) 아무리 성 소수자에게 잔인하고 매정할 지라도 말이다. 누가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다양성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인간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그건 차라리 ‘무지’와 ‘무식함’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낸시의 삶이 광란의 음란마귀(?)에서 끝났다면 나는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짊어지고 자기다운 인생을 찾아나간다. 3부는 1부에서 느꼈던 강렬한 설렘 같은 감정은 없었지만 읽으면서 사람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온기와 그로 인한 정서적 안정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다시 낸시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다.
세라 워터스라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니면 퀴어 소설이 원래 이렇게 흥미진진한 건가? 퀴어를 읽다가 내 성 정체성이 흔들릴 지경이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