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2부의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솔로몬
(본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친코 소설을 2부까지 모두 완독했다.
한수로부터 얻은 선자의 첫째 아들인 노아가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었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대목에서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소설 속에서 노아는 자신만의 은밀한 비밀들을 마음으로 품고 자라나는 내성적인 아이로 묘사되는데 그의 결말이 결국 불행으로 끝날 거라는 암시는 이미 이 문장을 통해 드러나 있다.
‘그러나 노아가 이 모든 비밀들보다 더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은밀한 소망은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절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노아의 가장 큰 꿈이었다.’
그러나 나는 노아의 마지막이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노아의 죽음을 접했을 때 나는 그의 부모라도 되는 마냥 망연자실해 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책의 빈 공간만 멍하게 바라보았다.
지금은 비록 재일동포의 삶과 대우가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멸시와 차별의식은 깊은 내면 의식 속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의 조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그 뿌리가 깊다. 지금도 그러한데 식민지 시절과 해방 직후의 그 시절에는 오죽했겠는가. 노아의 간절한 소망은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반면 선자와 이삭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들인 모자수는 내성적인 형과는 다르게 끔찍한 현실을 정면 돌파하는 쪽을 택하는 재기 발랄(?)한 아이로 묘사된다. 모자수는 자신을 더럽고 천한 조선인이라고 놀리는 아이들을 어린 시절부터 거리낌 없이 두들겨 패주는 행동으로 응수한다. 학교생활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게 된 시점에서 그는 미련 없이 학교라는 폭력적인 공간을 떠나 곧장 파친코 업계로 뛰어드는 과감한 결단력도 보여 준다. 파친코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점차 확장해 나가고 마침내 파친코라는 사업을 통해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어 내는 모자수의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로서 소설 속 인물들 중 그를 가장 많이 응원하면서 읽었다.
파친코 사업은 조선인으로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동시에 일본인이 가장 천시하던 일이라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조선인은 평범한 일자리조차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일본인들이 꺼려하는 업종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가 파친코 사업이었는데 당시 파친코는 조직 폭력배였던 야쿠자가 운영한다는 인식이 강해 일본인들에게는 ‘범죄자나 하는 더러운 일, 조선인과 같은 천한 민족이나 할 수 있는 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선자의 가족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점에서 소설의 제목 ‘파친코’가 갖는 의미와 상징성은 꽤나 중요하다.
파친코는 차별과 멸시, 가난 속에서도 끝까지 버티며 살아남은 재일 동포의 강인한 생명력이자 의지인 동시에 남부럽지 않은 경제력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혐오와 멸시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의 서러움이자 한을 상징하고 있다. 나는 전 리뷰에서 파친코라는 소설 속에 별다른 상징이나 은유, 비유가 풍부하게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 실망했다고 했으나 제목 자체가 이 소설의 커다란 상징이자 은유였다는 점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모자수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교육을 받고 사회 엘리트 계층으로 승선하게 된 선자의 손자 솔로몬 또한 여전히 일본 국적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은 같았다. 여전히 일본이라는 국가에게 그들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자신의 조국을 침략했던 일본이라도 태어나서 오랜 시간을 살아 온 땅이라면 자연스레 그 국가에 애착과 정이 생기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노아는 아예 일본인이 되고 싶었고 선자의 가족은 모두 일본국적을 얻은 일본의 시민이 되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4대째 일본에 발 붙여 살았던 선자의 가족은 90년이 다 된 현대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은 여전히 재일동포에게 외국인 여권을 강요했고 자신들의 땅에 발붙여 사는 조선인을 ‘남한인’과 ‘북한인’으로 나누어 구별하기 시작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보인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타민족에 대해 얼마나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지를 또 한번 통감하게 된다. 차별과 멸시의 시선을 한결같이 던지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미운 정’이란 정을 붙이고 살아야만 했던 우리 민족의 모습이 한없이 애달프고 짠하기만 하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안 그래도 컸던 반일감정이 소설을 읽고 나서 더욱 증폭되었다. 지금 그 곳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처우가 어떻게,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친절과 예의바름을 가장한 냉혹하고 잔인한 일본의 그 위선적인 모습에 구역질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해방이 되어서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힘 없는 국가의 비극적인 과거사만을 상기시켜 주어 씁쓸하기만 하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한국은 또다시 서구열강의 개입에 의한, 그놈의 '이념'으로 인해 남북으로 갈라지는 비극을 맞게 된다. 게다가 얼마 후에는 남북 전쟁까지 터지는 처참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으니, 한 마디로 한국은 더 이상 재일동포들이 돌아가서 ‘살 수가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덕분에 한국에 무기를 팔았던 일본은 부강한 나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 대면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나는 소설을 통해 또 마주해야 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상관없다.’ 소설을 시작하는 강렬한 이 첫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4대로 이어지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솔로몬이 회사에서 해고되는 과정을 드라마와 소설이 완전 다르게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소설 속의 스토리 설정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중요한 순간에 갑작스런 민족애를 발휘하여 스스로 일을 그르치는 드라마 속 솔로몬의 모습은 어쩐지 약간 작위적으로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솔로몬의 회사가 진행하던 프로젝트에 유일하게 걸림돌이 되었던 조선인 할머니 마쓰다를 솔로몬이 회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소설 속 스토리가 더 현실적이다. 중요한 거래를 성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의 마지막에서 회사로부터 버려지는 솔로몬의 모습은 그래서 더 비참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과정, 조선인에게 차별적인 시선을 가진 상사 가즈가 만들어낸 당치도 않은 명분으로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솔로몬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 현실적이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대하는 한결같은 방식, 드라마에서도 이 스토리를 그대로 살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솔로몬은 아무리 고등교육을 받고 일본인들과 대등하게 살고자 원했어도 절대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결국 깨우치게 된다. 결국 그 잔인한 굴레를 박차고 나오는 솔로몬의 선택에서 소설은 역시나 ‘파친코’가 상징하는 큰 의미를 다시금 곱씹게 해준다.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소설이라 해도 일본은 할 말 없다. 자신의 역사에 반성의 기미도 없거니와 어떻게든 역사를 왜곡시키고 미화시키려 드는 일본의 뻔뻔한 모습에 여전히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아, 반일과 애국으로 끝내려던게 아니었지만 부디 파친코가 널리널리 읽히고 드라마는 더욱 더 승승장구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