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윤 Aug 30. 2021

삶과 죽음, 그 모호한 경계 - 영화 '그랑블루'

 - 제가 얘기하는 모든 영화와 소설작품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소년은 엄마가 집을 나간 이후로 타인에게 무언가를 묻지 않았다. 아이는 말을 잘 하지 않았고 왜 그 나이에 그렇게 질문도 없냐는 삼촌의 질타에 엄마는 왜 집을 나갔냐는 물음 뿐이었다. 엄마는 떠난 것이 아니라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을 뿐이라는, 뭔가 심오할 듯 말 듯 했던 삼촌의 대답은 곧이어 여자는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종이라는 사족으로 매듭을 짓는다. 그래서 소년은 자라서도 여자를 믿지 않았고 결국엔 사랑하는 여자를 무심히도 내 팽개쳐 버리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자신을 내던진다는, 다소 감상적이고 뻔한 류의 스토리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내 바램과는 다르게 그랑블루는 결코 뻔한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이 영화를  10년 주기로 한 번씩 더 보고 있다. 그래서 10년 후, 또 10년 후인 지금, 세 번째 다시 보는 중..     

 


  현실도피.

 지루함과 고달픈 순간의 연속인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도피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도피처, 혹은 아지트를 다들 하나씩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게 없다면 삶을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지.

 주인공 자크에게 완벽한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곳은 깊은 바다 속이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간 후  자크는 바다 위로 다시 올라와야만 하는 순간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거든.”


 그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면 나는 우울증인건가? (근데 그 말을 왜 하필 연인 앞에서 하는지, 무심한 놈.)


 깊은 물속에 있으면 왠지 모를 해방감이 느껴진다. 몇 년간 수영을 하고 다이빙도 해 보면서 알게 되었다. 감독의 바다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동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과 세상이 한 순간 정지되어 버린 느낌. 그 안에서 숨을 쉬지 않는 나 또한 이 순간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영화 속 자크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다이버라면 내 말에 공감해 줄지 모르겠다.     


  ‘행복하세요!’ , ‘그래서 그 둘은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대체로 시니컬한 편이다. 환희와 기쁨은 찰나일 뿐, 인생은 전반적으로 힘들고 고달프다. 지루함의 연속이다. 그래서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가 있고 모험으로 가득한 동화가 있고 비현실적인 로맨틱 영화와 멜로드라마가 판을 치는 거 아니겠어? 그러나 그랑블루는 전자 중 어느 것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랑블루는 현실 그 자체다.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잔혹동화. 아니 잔혹영화.

 

 물론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장면도 있다. 누가 돌고래 지느러미를 잡고 돌고래와 함께 수영을 할 수 있겠어. 꿈같은 장면이다. 그랑블루를 보고나서 프리다이빙을 심화과정까지 배운 이후 돌고래와 함께 유영해 보겠다는 인생목표가 생겼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상실감.

 어린 시절 너무나 큰 상실을 연달아 경험했던 이는 자라서도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한다.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또 잃을까봐 두려워서 마음을 완전히 열지도 못하는 안타깝고 불완전한 한 인간. 친구 엔조의 죽음으로 두려움이 또 현실이 되어버리는 순간 자신을 죽음으로 내던지는 자크와 자크의 옆에서 오열하는 조안나의 마지막 장면은 슬프다 못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마음이 미어졌다.


  ‘현실도 지치는데 왜 이런 영화까지 봐야 하냐.’ 그런데도 오랜 시간 이 영화는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는다. 10년 후 또 보게 된다.

 

 그랑 블루를 처음 봤을 때 내가 집중했던 건 ‘자크와 조안나의 사랑, 자크와 엔조의 묘한 우정’ 정도였다. 10년 후 다시 보고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건 자크의 자아와 내면세계였고 거기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그리고 또 다른 10년 후 비로소  나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심연과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한 감독 뤽 베송의 통찰을 볼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순간 모호해 진다. 그 순간 우리는 죽음에서도, 또 삶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크는 표면적으로는 자살을 선택했지만 영화의 마지막 씬으로 표현된 풍경은 결코 죽음이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자유와 해방이었다. 마지막 씬은 예술 그 자체였다.  이 영화를 살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유이다.



 P.S  보는 내내 못마땅했던 점이 있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이 묘사되는 방식과 그 캐릭터들을 대하는 태도. 순간적으로 불쾌할 수 있지만 그러나 뭐, 촬영 당시가 80년대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땐 그럴 수도 있었겠지. 아무리 유럽이었더라도.

매거진의 이전글  제목 '파친코'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