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가지 위에 엷은 새싹들이 움트려던 때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산책로와 호수공원의 나무들은 벌써 짙고 푸른 나뭇잎으로 무성해졌다. 지난겨울 매섭게 바람을 맞고도, 그래서 내 눈에는 모두 죽은 듯 보였던 마르고 볼품없던 나무들도 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저마다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걸 보면 어떨 땐 갑자기 이 모든 현상이 믿기지가 않도록 신기할 뿐이다. 자연의 생동력이 신비롭기도 하고 이젠 경외스럽기까지 한 걸 보면 나도 자연과 세상을 관조할수 있을 만큼의 나이가 되었나 보다.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벚꽃이 만약 사시사철 내내 피어있다면 벚꽃 나무를 보는 번번이 그렇게 경탄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유난히도 설렘과 조증(?)을 도지게 하는 차란한 봄이 아무런 변화 없이 끝까지 이어진다면 그렇게 마냥 봄이 소중하다고만 느낄 수 있을까. 유한한 20대의 젊음이 아름답듯 말이다. 우리가 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꽤 오랜 시간의 겨울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몇 달씩 지켜보았기 때문인지도. 매서운 바람을 오랜 시간 견디다가 드디어 싹을 틔워내는, 인고의 생명을 보고 상대적으로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걸 수도.
그렇게 보면 우리의 인생 안에는 고통이 있기에 기쁨과 행복도 같이 존재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든다. 희노애락 중 인생에 ‘희(喜)’와 ‘락(樂)’만 있다면 그게 정말 기쁨과 즐거움인지 알 수나 있을까. 마치 우리가 매일 당연하듯 마시는 공기 같을지 모른다. 세상만사 모든 감정은 상대적인건가 보다.
모진 겨울을 거듭하고도 계속 살아서 성장하는 나무일수록 기둥이 더욱 두껍고 튼튼해지듯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을 자양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한결 이 고통스러운 인생을 견디기 쉬워질 것이다.
아주 잠깐일지라도 행복의 순간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는다고 느꼈을 때, 반대로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내어 줄 때, 또는 업무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만들어 내고 인정 받았을 때, 어떤 사람은 단순히 술 마시고 기분 좋은 순간일 수도 있다. 이런 순간들을 우리가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건 우리의 인생에 고통과 비극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산책로를 걷다가 결론에 다다른 일인.
‘행복을 선물하는 진짜 존재는 고통이다.’ 다소 어이없는 이 역설적인 결론을 내리고 나면 앞으로 언제든 닥칠지 모르는 시련과 시행착오, 불행 앞에서 큰 두려움 없이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걸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아량과 마음의 근육을 갖게 될 지도.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