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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Jul 31. 2022

애쓰는 자는 계속 애쓰기만 할 뿐이다.

책 '노력의 기쁨과 슬픔' 리뷰 겸

 때때로 이렇게 무서운 지루함과 무기력함이 온 몸을 덮쳐올 때면 어떤 셀프처방전을 내려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저항하지 못한 채 무기력한 기운 한 가운데에 있는 수밖에. 창밖으로 오랜만에 비가 내리고 글쓰기도, 책 읽기도 좋은 날씨이지만 쓰고 싶지도, 딱히 읽고 싶지도 않고 뭘 해도 재미없을 것만 같은 이런 기분은 도대체 어떻게 물리쳐야 하는걸까. 이 모든 게 그저 호르몬 탓이겠지, 내 탓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냥 그러려니 해 진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너무 오랜 시간을 소진한다. 생각하고 준비하고 이것저것 재고 따지느라 길고 긴 시간을 소비하는데 알고 보니 이 모든 게 다 ‘꾸물대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약간 침울해진 상태다.

 데카르는 ‘망설임은 모든 악 중에서 최고의 악이다.’라 했다. 아니, 이게 신중에 신중을 기해 유일하게 참이라고 결론 내렸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만든 주인공이 한 말이라는 거야? 다소 어리둥절하지만 ‘노력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에서 이 구절을 읽고 어쨌든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자기 계발서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래서 사람들이 이런 류의 책을 그렇게들 읽는구나 싶다. 현재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채택한 책이라 사실은 하는 수 없이 읽었지만 책을 통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책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을 바꾸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완벽한 타이밍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자 하는 일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고, 그 일을 매일 하되 그저 조금씩 나아지기만 하면 된다고 얘기하는 쿨한 저자, 삶은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삶 자체가 품고 있는 추진력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배우는 쪽을 택하라는 조언은 너무 멋지지 않은가. 자기 계발서를 읽고 전율한 적은 처음이다.     


  다만, 시작하려고 하는 그 ‘무언가’는 반드시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점, 그리고 그 분야에 어느 정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저자는 분명히 하고 있다. 피나게 노력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도 있듯이, 나와 맞지 않는 일을 파고드는 것 자체가 자신을 거스르는 거대한 저항이라는 점, 그것을 견디겠다고 고집을 세우면 언젠가는 나처럼 큰 병이 올 수도 있다. 

  내 경우에는 내가 예전에 했던 일이 ‘재능은 있으나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는 게 아니라고들 하지만 생업 자체가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이다. 안 그래도 고통이 따르는 생업을 ‘덜 좋아하는 일’이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로 삼는다면 스트레스와 고통이 배가 되지 않겠는가. 생업은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일 때 베스트가 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야생의 부름’이라고 칭했다. 표현이 약간 재밌지만 우리는 이 ‘야생의 부름’에 응할 때만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자신에 대한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 해주는 적절한 예시로 영화 ‘그랑블루’의 프리다이버이자 두 주인공인 자크 마욜과, 엔초 마요르카의 훈련 스타일을 들 수 있다. (픽션인줄로만 알았는데 실존인물이자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람.) 영화에서 자신이 최고라는 듯 시종일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등장하는 인물인 엔초는 숨을 좀 더 길게 참기 위한 훈련 방법으로 무거운 납을 몸에 두르고 숨을 참은 채 건물의 계단을 오르는 것을 택하고는 이 고된 훈련을 매일 실행했다고 한다. 반면 자크는 이런 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일체의 방식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재미있게도 자신이 그저 돌고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것이 그저 상상만이 아닌 정말로 자신이 돌고래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했다 하니, 이건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 문제 아닌가?

 

 어찌 됐든, 인간의 맨몸으로 수심70미터 아래로 내려가면 폐의 압착으로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는데  자크는 70미터를 통과했을 때 몸의 혈류가 마치 기적처럼 폐와 뇌로 활발하게 방향을 트는 이상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는 깊은 수심에 있을 때 고래의 몸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정확히 일치한다고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의 상상처럼 그가 정말 고래로 변해가고 있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고래가 인간으로 잘못 태어났던 건 아닐까.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뒤로 하고, 그는 물속 환경을 그만큼 즐겼다는 점, 바다를 마치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영화에서도 자크의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바다 속에 있으면 나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어.’ (이 대사를  눈치없이 자신의 애인 앞에서 해댔다!) 그렇기 때문에 엔초 마요르카처럼 애쓰거나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불가능한 영역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크에게는 바다 속 프리다이빙이 ‘야생의 부름’이었던 셈이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야생의 부름에 응답하며 사는 건 어떨까. 인생은 짧고 그만큼 나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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