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운명이 있다는 말.
속된 말로 팔자라 하지.
대학시절 학교 앞에 쌍과부 밥집이 있었어.
간판에 뭐라 밥집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우리들 사이에서는 뜻도 이유도 생각해 보지 않은 채
쌍과부집이라면 간판에 적힌 이름보다 더 잘 알아 들었지.
좌우간 쌍과부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였는데
그 집은 교수나 학생들에게나 같이 인기 있는 집이었어.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그 이유는 생각이 안 나지만
아마 학생에게는 너그럽고 푸짐한 인심을, 교수에게는 나름 어른 대접으로
믿을만한 인심을 베풀었던 것 같아.
그녀들은 무언가 생에 통달한 사람처럼
가끔 술 취한 학생들이 깽판을 부려도, 1년 너머 외상값을 값지 않아도
큰소리나 작은 소리나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었어.
무표정한 듯, 웃는 듯...
그냥 그 자리에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어.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라고 말하면
"그래, 가라."라고 비킬 운명이 있고
"무어? 미쳤어? 니가 비켜라." 할 운명이 있는 것 같아.
1978년 12월.
금강다방에서
대학 초년생들의 초온스런 미팅이 벌어졌어.
여학생들이 소지품을 각자 하나씩 내고 남학생들은 그걸 집어 짝을 맞추는
이른 바 고전답파 미팅.
그때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신도 대타로 나왔다 했고
대타로 나온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뛰어 나온 바람에 뭘 구해보겠다는 적극적인 의지 없이
다음 알바 스케줄에 조바심만 났었어.
미팅 주선자가 보기로는 자신하고 제일 친분이 있던 B라는 남학생과 내가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에
빨리 B에게 볼펜을 주우라는 귀띔을 했는데 난 정말 없어 보이는 싸구려 볼펜을 냈었고
B는 옆 친구가 낸 예쁘고도 비싸서 볼펜으로 안 보이는 소지품을 얼른 집어 들었지.
당신은 대타니까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덩그러니 남은 내 볼펜을 집었고...
그로부터 시작된 길고 긴 우리의 이야기...
운명이란 시력을 얻고 시력을 잃을 때까지의 기나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단 몇 초 사이에 그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는 것 같아.
앞으로 운명이
어떤 입김으로 내게 다가올지 알 수 없지만
대타 역할처럼
운명에 안기지 말고 조금은 옆으로 비켜 서서
그 소용돌이에 바쁘지 않았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