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
*이 글에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는 ‘날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주제가 변주된다. 우리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은 동시에 파괴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단단한 벽을 부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삶은 비극적인 방식으로만 아름다워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보는 일
형사와 피의자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타인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의심한다. 이 사람은 누구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진심인지. 모든 걸 똑바로 봤다고 생각하는 순간, 낯섦이 들이닥친다. 그 한순간의 낯섦은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소환시킨다. 내가 몰랐던, 이해하지 못했던, 오해했던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다. 모든 일이 환상처럼 느껴질 만큼 그렇게 빠른 속도로 기억을 붕괴시킨다.
해준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처음에도 중간에도 마지막에도. 그는 너무 자세히 봐서, 깊이 봐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자살과 피살, 진심과 거짓말이 어지럽게 뒤엉킨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이 서래를 정확히 봤다는 건 아니다. 어쩌면 해준의 재킷 속 립밤과 사탕만이 서래의 진심을 제대로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볼뿐이다. 어떤 존재보다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이 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서래는 외롭다.
영화는 해준의 시점 아니, 의심의 시점을 따라가게 한다. 해준이 서래에 대한 의구심을 내려놓을 때도 관객은 후배 형사의 눈으로, 해준 아내의 눈으로, 할머니의 눈으로 계속해서 서래를 의심한다. 그녀가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흔적도 없어지고 나서야 진심을 믿어준다. “당신같이 믿음직한 사람들은 나와 결혼해주지 않으니까.”라는 대사에 마음 한 구석이 뜨끔한 이유다. 사람들은 바보 같은 사랑, 내가 바보가 되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 사랑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야 정말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조건적인 믿음만이 상대의 거짓 속에서도 진정한 진심을 찾아낼 수 있다. 해준이 그녀를 완전히 믿은 순간, 그녀의 비밀을 깨달은 것처럼. 온전히 의심을 놓고, 이성을 놓고, 붙들고 있던 무의미한 삶을 놓고 사랑해야 했다. 살인을 했든 안 했든, 날 사랑했든 안 했든.
영화의 시간은 뒤섞여 있다. 흐름이라는 것은 있지만 그 조각들이 정확한 순서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기억일지도 환상일지도 상상일지도 모르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진다. 서래와 해준이 처음 만나 서로를 응시하던 침묵의 순간, 둘은 그들의 결말을 봤을지도 모른다. 손이 스치며 밝은 빛이 비치던 순간, 눈 내리는 호미산에서의 밤을 이미 살아냈을지도 모른다. 결국 영화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 누구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영화 속 침묵이 더 좋다. 내 기억이 아닌데도 문득 어떤 순간들이 떠오른다. 마지막 순간, 해준이 신발 끈을 묶는 장면에서 굳이 플래시백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비 오는 날, 절에서 신발 끈을 묶으며 그의 손에 닿았던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농락하는 사람과 농락당하는 사람 중 누가 더 불행한가?
농락당하는 사람은 의심과 안도의 순간을 반복하면서 행복을 맛본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졌을 때 분노할 권리를 갖는다. 농락하는 사람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순간도 진심으로 행복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대상을 사랑한다면 더욱 괴롭다. 상대에게 진실되는 순간,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될 것이 분명하니까. “우리의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라는 서래의 대사는 농락한 사람의 받아들여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말해보는 마지막 호소일지도 모른다. 농락한 사람에게 남은 것은 거짓된 행복, 차가운 분노다. 농락당한 사람에게는 그래도 조금의 진심이 담겨있는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두 질문은 잘못된 교차로에서 만났다. 해준의 질문은 서래의 사랑이 시작되기 전에, 서래의 질문은 해준의 사랑이 끝나기 전에 던졌어야 진실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을 테니까. 처음부터 두 사람은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한 발 늦거나 빨랐으니까. 사랑은 엇갈림을 본질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치는 순간은 있을 수 있어도 완전히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는 없다. 농락당한 해준의 삶은 공교롭지만 농락한 서래의 삶은 불쌍한 이유다.
누군가에게 미제사건으로 남고 싶은 사랑의 욕망
해준은 왜 서래와 이야기할 때 번역기를 쓰지 않았을까? 그도 의문을 남겨두고 싶었던 것 아닐까. 조금은 설명하지 않은 채로,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고 싶은 구절이 있어서. 자신이 서래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서래가 자신을 떠올리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의문을 남겨두고 싶어 한다. 그래야만 나에게서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하니까. 그녀가 절에서 해준의 음성녹음을 듣고 낮게 '젠장'이라고 읊조린 이유는 그에게서 지워지고 싶지 않아 졌기 때문이다. 자신을 관찰하고, 관련된 숫자를 외우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밤이면 하염없이 자신의 사진을 바라보기를 원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의 모든 의문이 풀리면 자신을 이전처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의문을 남겨둔다. 해준이 다시는 자신과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하도록 모래 속 바다에 파묻힐 결심을 했다. 독한 것, 서래는 그렇게 독하게 헤어질 결심을 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해준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왜’가 없다. 언제나 하는 섹스만 있다. 그게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관계의 끈이다. 그것만으로 그럭저럭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서래와 해준 사이에서는 계속해서 질문이 오고 간다. 해준은 왜냐고 끊임없이 묻는다. 형사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서래는 끊임없이 답한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믿든 믿지 않든. 사실 그 두 가지는 언제나 섞여있지만.
해준이 잠이 안 온다고 했을 때 병원에 가거나 통계자료를 제시하는 아내와 숨소리를 들려주는 서래.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사실상 해준과 비슷한 사람은 아내다. 서래는 모호한 사람이니까. 할머니를 정성껏 모시면서도 자신의 알리바이에 이용하는 것처럼. 해준은 서래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서 사랑하게 된 게 아니다. 안개 같은 사람이라서 사랑한 것이다. 마치 영원히 풀 수 없는 미제 사건처럼 흐릿하지만 언제나 꼿꼿한 자세로 서 있어서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결국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닌 자신이 쫓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히 불륜 또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건 시시하다. 그 이상, 그 너머의 것이다. 둘 다 서로를 사랑할 결심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결심을 한다. 해준의 헤어질 결심은 ‘붕괴’를, 서래의 헤어질 결심은 ‘바다’를 남겼다. 그래서 서래는 붕괴 속에서, 해준은 바다에서 헤맨다.
해준은 자신의 헤어질 결심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지 않았다. 서래가 사전으로 '붕괴'라는 뜻을 스스로 찾아봐야 했다. 서래는 오롯이 혼자 그 답을 찾아야 했다. 해준은 자신이 경찰로서 수사를 망쳐서 붕괴되었다고 말했지만 그건 정말 붕괴된 것이 아니다.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 삶이 사실 텅 비어있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부부 관계, 직장에서의 보람. 형사로서의 능력,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꼈던 세계의 허점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해준의 헤어질 결심은 그가 아닌 서래를 붕괴시켰다. 결국 무너져서 쓰러진 사람은 서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해준도 마찬가지다. 서래가 남긴 '바다'에서 그는 진정으로 붕괴된다. 스며들어버린 사랑 때문에. “마침내 우는구나.” 서래가 남긴 마지막 대사가 아닐까.
완전히 붕괴될 각오가 없는 우리의 사랑할 결심은 너무 흔하고, 헤어질 결심은 너무 가볍다.
그래서 마침내,라고 사랑의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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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비 내리는 하루를 사랑할 수 있는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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