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이 글에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은 심장 박동 소리로 시작된다. 암전된 무대위 범퍼에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의 감동이 새롭게 와닿는다. 심장은 심전도만이 그 존재를 표현해 준다는 나레이션이 이 극의 시선을 드러낸다. 그리고 심장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시 마지막 심장 박동으로 수렴된다.
이 연극은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Maylis de Kerangal)의 동명 소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원제:Reparer les vivants)>을 각색한 1인극이다. '서술자 외'라는 역할로 총 15명의 인물을 단 한 사람이 연기한다. 2019년 초연과 2021년 재연에서는 손상규, 윤나무 배우가 연기했고, 2022년 삼연에서는 김지현, 김신록 배우가 합류했다. 나는 2021년과 2022년 모두 손상규 배우의 공연을 봤다. 단 한 명도 똑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서술자의 무사심한 태도와 이야기 속 인물들의 격한 감정들을 자유자재로 넘나 들었다. 유머, 고통, 설렘, 감동 등 역할의 개수를 훨씬 뛰어넘는 섬세한 감정들이 극 내내 전해져 온다. 1인극의 묘미와 매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시선은 분산되지 않고 관객은 무대 위 한 명의 배우와 한 개의 심장과 마주하게 된다.
한 명의 배우로 만난 여러 명의 인물들에 대한 생각.
장기 기증자, 시몽
시몽에게 죽음은 성큼 다가와 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죽음의 그림자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시몽은 인생의 마지막 서핑을 완벽하게 즐겼으니까. 심장은 그 순간 가장 크게 뛰었고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줬다.
어쩌면 자신은 거부했을지도 모를 장기이식의 수술대 위에서 자신의 몸에서 장기들이 분해되기 전 아버지가 들려준 워크맨 속 파도 소리는 시몽에게 닿았을까? 어쨌든 그 파도 소리를 듣는 시간이 마지막으로 시몽의 심장이 시몽에게서 뛰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장기 기증자의 가족, 마리안과 션
의사는 아들이 죽었다고 한다. 아직 혈색이 돌고 아직 따뜻하고 아직 살아있는것처럼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장기의 기능이 떨어지기 전에 기증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한다. 비극을 받아들이기도 힘든 그들은 더 버거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 아들의 장기 이식을 결정하는 건 마치 스스로 그의 죽음을 인정해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몇 억 광 년 떨어진 세계에서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 다신 들을 수 없을 그 목소리. 이제 그녀는 그를 이 잔혹한 세계로 끌어들여야 했다."
가족의 죽음을 전하는 순간의 고통이 너무나 생생하게 와닿았던 문장.
"시몽, 우리 모두가 너와 함께 있어."
시몽과 우리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일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고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우리'에 속한다는 건 기쁘면서도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 이게 내 아들이지."
시몽의 장기가 다른 곳으로 갔어도 시몽은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걸 기억하는 것이 기증자의 가족이 할 수 있는 가장 슬프면서도 기쁜 일인 것 같다.
장기 기증자의 연인, 줄리엣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순간들을 함께 공유했던 건 그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심장이었을까? 미안함과 즐거움이 반반 섞인 "이따 전화할게'라는 목소리는 이제 영영 다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대화가 마지막 일줄은 아무도 몰랐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건 묘한 기분일 것 같다.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토마
그를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직업 정신이 투철하다고 해야 할지.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의 공감이 위선인지 진심인지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다 어느 순간 그걸 구분하는 건 의미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책임감과 안타까움은 공존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완전히 진심이거나 완전히 위선일 수는 없다. 그 비율이 조금 다를 뿐.
장기기증을 받는 사람, 클레르
"아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그들은 수혜자가 아니다. 단지 선택의 여지가 없을 뿐. 그들은 수혜자라는 이름으로 마치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도 편치 않다. 자신이 장기를 기증받을 수 있다는 건 누군가 죽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과 성별도 알 수 없는 기증자와 그 가족에게 영원히 고마움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대사가 먹먹했다.
그리고 의사들
수술 장면은 단순히 기계 부품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듯이 이성적이고 차갑고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진다. 심장이 새로운 몸에서 다시 뛸 때 그 소리는 태초의 심장 박동, 극을 열었던 심장 박동과 오버랩된다. 하지만 그들은 수술이 끝난 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성스러운 세계에서 다시 속된 세계로. 이식된 심장이 다시 뛰는 경이로운 순간의 감동은 그렇게 오래 남아있진 않는다. 그래서 더 좋았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니까. 이 작품이 장기 기증의 숭고함만 강조하고 그 과정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면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을 것 같다.
사실 이 극을 보고 나면 장기 기증에 대한 입장이 확실해질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공연을 보고 난 뒤 애초에 그런 기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장기 기증은 단순히 찬반으로 나누어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 과정은 숭고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잔인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가치 있지만 가슴 아프기도 하고, 슬프지만 경이롭기도 한 일이다.
심장을 만난 사람들의 삶의 단면들이 흥미롭다. 너무 감상적이지도 않고 너무 냉소적이지도 않게 묘사되는 순간들. 다 심장이 뛰고 있는 순간들이다. 어쩌면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해서 심장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들.
공연을 본 뒤 한 번씩 내 심장 박동을 느껴보고 싶어 손을 가져다 대본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뛰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살아있다는 건 심장이 뛴다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게 이 소재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 삶과 죽음이라는 어려운 진리를 이해의 장막 없이 가장 순수하고 단순하게 마주한 느낌이다.
근사한 주말을 위한 추천 작품
다양한 인물들이 함께 '삶의 박동'을 이어가는 따뜻한 이야기 뮤지컬 <빨래>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토/일 오후 2시&6시 반 (2회 공연)] ~202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