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씨의 비밀

소설 <아버지와 이토 씨>

by 아트필러

다정함 그리고 의외의 단호함.


이토 씨라는 사람의 느낌. 원래 그런 사람인 걸까? 아니면 어떤 일들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종종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레이먼드 커버의 <깃털들>의 버드와 올라처럼 스스로 행복해질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집이나 애인 또는 배우자, 외모, 직업은 그들에게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 것들로는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주변에서 ‘이토 씨는 어떤 사람이야?'라고 줄기차게 묻는 이유다. 정작 본인은 그 질문에 급식 도우미 아르바이트생이라고 답하지만.

<아버지와 이토 씨> 표지, 교보문고
“... 이토 씨,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일 년 반 이상 함께 살아온 남자의 눈을 쳐다보며 묻는다.
“제일 초등학교의 급식실 아저씨입니다."
색소 옅은 홍채에 장난꾸러기 같은 빛이 요동쳤다.


영화 먼저, 책 먼저

common (17).jpeg 영화 <아버지와 이토 씨> 스틸컷, 네이버 영화


2017년, 소설을 원작으로 우에노 주리(아야 역), 릴리 프랭키(이토 역), 후지 타츠야(아버지 역) 주연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각색의 묘미를 느끼고 싶다면 영화를 먼저 보는 것을 권한다. 영화는 소설과 시간도 사건도 다르게 엮여있다. 책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보면 원작의 이야기 흐름과 달라서 오히려 감정선을 따라가기 힘들거나 몰입이 깨질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책 보다 훨씬 더 함축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 캐릭터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원래는 이미지가 그려진 상태로 책을 읽기 싫어서 영화보다 책을 먼저 읽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번만큼은 영화와 책을 둘 다 잘 즐기려면 영화를 먼저 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아야는 참 운이 좋다. 이토 씨처럼 단단하고 독특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니 말이다. 그래도 영화를 보면서 이토 씨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보다 이토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드라마에서도 언제나 희망차고 사랑이 넘치는 여자 주인공이 아닌 멋대로 구는 재벌 남자 주인공 역할을 탐내는 편이다.) 어차피 지금 내가 이토 씨를 만나해도 그를 알아보지도 못하거나 아야처럼 혼란 속에서 한심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난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 천천히 해"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아니 그럴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이토 씨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했다. 메인 감상 작품을 영화가 아닌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멋진 문장

소설 <아버지와 이토 씨>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아도 한 번 더 곱씹게 만드는 문장들이 많아서 읽는 재미가 있다. 단순히 그럴듯해 보이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하나 다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의미를 담고 있다.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아~그런 의미였구나’하고 수긍이 간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밀도 높은 소설이라고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많아서 필사를 많이 했다.


눈 깜짝할 새에 10월이 지나간다.
아침저녁 공기는 시원함을 통과해 이미 차갑다.
그 공기에 나무들이 땅으로 돌아가는 향이 희미하게 섞인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공기의 온도와 향기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11시 가까이가 돼서 돌아온 이토 씨는 평소답지 않게 취한 듯했다. 뺨이 불그스름하다.
옅은 갈색의 홍채가 게슴츠레 풀려 당장에라도 흰자에 녹을 것 같다. 이런 이토 씨 모습은 처음이었다.


술에 취해 풀린 눈을 흰자에 녹을 것 같은 홍채라고 표현하다니, 정말 감탄해서 여러 번 읽었던 문장이다. 앞으로 취객을 보면 반숙 계란 프라이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파르페

책을 읽고 음식이 먹고 싶어진 건 꽤나 오랜만이다. 아야가 오빠와 함께 먹었던 파르페를 먹어보고 싶었다. 파르페를 먹으며 가장 불행한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입에 퍼지는 달달함. 귀에 들리는 씁쓸함. 두 가지 감각 기관에 정반대의 감정이 깃들면 뇌는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 (집 주변에 파는 곳이 없어서 수소문 끝에 버스까지 타고 먹으러 갔는데 함께 시킨 수플레가 너무 맛있어서 정작 파르페는 다 먹지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은 맛이었다. 인생이 힘들 때 사람들이 달달한 디저트를 먹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아버지와 딸

common (19).jpeg 영화 <아버지와 이토 씨> 스틸컷, 네이버 영화


내 생각은 아버지의 등에 도착하기 전에 쿵 하고 중간에서 떨어져 어딘가 먼 곳으로 살금살금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 버린다.
나는 머지않아 아버지를 따라잡겠지. 그리고 우산을 건넬 테지.
그때 내밀 말에,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거야.


아버지와 딸은 자라면서 어느새 서먹한 벽이 생겨버리곤 한다. 정확한 시점을 짚어낼 수는 없지만 언젠가부터 서로의 세계가 너무 많이 달라져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점점 서로 말과 생각을 삼키게 되고 그러다 많은 진심과 사랑을 놓치고 만다. 소설의 초반부와 마지막, 아버지에 대한 아야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게 뭉클했다. 아버지에게 망설이지 않고 말을 내밀 수 있는 마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토 씨의 비밀

앞서 이야기했듯이 난 책을 읽을 때 꽤나 큰 포부가 있었다. 바로 이토 씨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 영화와 달리 소설에는 단서들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책을 펼쳤다. 영화 속 몇 안 되는 단서 중 하나는 핵심적인 대사처럼 던져진 “00은 도망가지 않는다.”라는 문장. 하지만 책에서는 이토 씨의 말버릇으로 소개되는 말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힘이 빠지기도 했다. 뭔가 대단한 것 같았던 말이 그냥 사소한 말버릇이었다니…


하지만 그게 바로 이토 씨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해하지도 조급해하지도 않으면서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 마치 아무것도 도망가지 않을 것처럼 덤덤하게 사는 사람. 그리고 놓쳐버린 것에 미련을 갖기 않는 사람.


우리는 돈이든, 사람이든 확실하게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 한다. 이토 씨의 비밀을 알게 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갖지 못해서, 깨닫지 못해서 불안한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소유는 삶을 진정으로 채워주지 못한다. 가지려 할수록, 깨달으려 할수록 체력은 고갈되고 끝없는 갈증만 더해질 뿐이다.


common (18).jpeg 영화 <아버지와 이토 씨> 스틸컷, 네이버 영화


그리고 ‘이토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토 씨처럼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뒤통수를 때렸던 명쾌한 한 마디


하지만 그렇구나, 분명 이렇게 보여도 꽤 혼란스러워하고 있구나,
이토 씨도, 이토 씨라도, 이토 씨 나름대로.


삶의 조언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데 유용한 조언들을 얻었다. 너무 무겁거나 거창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토 씨와 간마니에 씨의 "그냥 그렇다고" 식의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간마니에 씨는 영화에서는 큰 비중이 있는 인물이 아니지만 소설에서는 이야기를 흐름을 끌어가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어느새 그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할 정도였다. 주변에 담담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고민 상담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아야는 직구가 지나쳐. 좀 더 변화구로 공격해야 돼.”

“알아.”

“아야도 말이야. 슬슬 변화구 던지는 걸 배우지 않으면 안 돼. 직구는 먹혀들어 가면 강하지만, 상대가 받아쳤을 때의 대미지도 커.”

“알고 있다니까.”


난 아야와 닮은 구석이 많은 사람이라 이토 씨의 이 말에 같이 발끈했다. 직구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받아쳤을 때의 대미지는 생각도 못했다. 정말이지… 이토 씨에게 정곡을 찔려 버렸다. 항상 솔직하게 말하지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녹다운되기 전에 확실히 변화구 던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기분은 일단 제쳐 두고. 냉동고에라도 넣어둬. 그러지 않으면,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을 놓치고 말아.”


기분을 냉동고에 넣어두기, 두고두고 써먹어야겠다.


그래도 영원히 이어지는 게 아니니까. 너무 외곬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 한창 힘들 때에는 잘 모르기 쉽지만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야, 대부분의 것은. 그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꽤 편해졌어. 그 뒤부터는 ‘기간 한정, 기간 한정’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어.


책을 읽고 나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짜증 나는 사람이나 상황을 마주하면 "기간 한정"을 되뇐다. 그러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 모든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근사한 주말을 위한 추천 작품


서로의 세상이 충돌한 아야 부녀와 달리, 서로가 유일한 세상이었던 부녀의 이야기.

내 삶의 모든 이유는 네 곁에 있기 위해서야, 영화 <파더 앤 도터> 그리고 Carpenters의 <Close to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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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빙, 웨이브, 네이버 시리즈온, 왓챠에서 감상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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