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고 산뜻하게 내려앉은 삶

유수연 시집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by 아트필러

사소하지만 묵직한 다정함을 맛보고 싶다면.


시집을 고르는 건 늘 운명적 만남처럼 느껴진다.

유수연 시집과 나를 이어준 건 날개에 적힌 시인의 말과 연분홍색 표지였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시집이라면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는 어렵고 이해할 수 없다는 너에게

꽃을 이해하려고 하니 되물었지

그런데도 나는 시집을 펼쳐놓고 오래 설명해 주었어

네 얼굴의 홍조를 사랑으로 이해하고 싶었으니까


마침내 피고 지는 게 행복이란 걸 알지만

무엇이 우리에게서 피고 졌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을게

그때 떨군 것들을 함께 주우러 갈 수는 없으니까


아직도 나는 사랑을 모르고 착하지도 않아


2024년 가을

유수연



마음에 남았던 시


대학생 때 한국 시를 읽는 교양 수업을 들었다.

그때 시의 한 구절만 인용하는 건 식물의 뿌리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다는 걸 배웠다.

그 뒤로 마음에 드는 시는 꼭 전부 필사해 두는 버릇이 생겼다.

비록 모든 구절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내가 마음을 뺏긴 그 문장의 생명을 생생히 담아두고 싶어서.

여기에 너무 많이 적어버리면 책을 직접 읽어볼 기대를 접을지도 모르니 딱 3편만 추렸다.


시는 역시 종이로 만져가며 읽는 맛이 좋으니까.



형 물이잖아


사주를 봐준다는 말이 좋다 내 미래를 예비해 주는 것 같다 내 미래를 걱정해 주는 말씨도 좋다


태어난 날 미래가 정해진다는 건 미신 같지만 설명이 가능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이해를 진심이라고 부른다


나는 금이니 자기랑 잘 맞을 거라던 너는 이제 없지만


네가 내 생일을 알아내기 위해 사주를 봐주겠다고 한 걸 나중에 알았을 때 내가 태어난 게 처음으로 좋았다


아주 사소하지만,

조금 유치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다정한 그런 기억.


그때는 스쳐 지나갔던 그 사람의 그 말 한마디가

그토록 오래 남아있을 줄이야.

그 작은 마음을 여전히 쥐고 있을 줄이야.



경우


경우가 없었다 자신이 경우 없는 행동을 한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지만 나는 경우 없는 행동을 잊지 않고 있다


그 사람이 내게 알려준 것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기로 했다


무례함에 무례함으로 대하는 건 젊을 때나 가능한 거라고

무례함에는 무응답이나 그 말이 맞다고 말하면 괜찮다고


그 말이 맞네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사과를 했다 사과를 뺀 사과를 받았을 때 나는 요즘 건강은 어떠냐고 물었다


술은 줄였습니까

당신을 걱정합니다


지나간 일이라고 지나치지 않기 위해

그 일을 잊을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원수에게 복수하지 않아도 어느 날 원수가 강물에 떠내려올 것이라고


강을 지나는 전철을 타고 갈 때면

그 사람이 떠 있는지 확인하곤 한다


아름다운 윤슬 가운데

정수리가 계속 아른거리며



지하철 2호선이 합정역과 사당역을 사이를 지날 때면 탁 트인 한강이 보인다.

아침에 통학할 때 한강에 아른거리는 윤슬을 넋 놓고 바라보는 걸 좋아했었다.

매번 다른 빛깔로 반짝거리는 수면을 보면 인생도 반짝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한강을 지나면 다시 검은 터널과 플랫폼으로 이어지지만,

무조건 그 짧은 햇빛이 비추는 순간이 온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으니까.


인생에서도 해 뜰 날이 온다는 확신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종려


하느님은 화장터의 연기를 보며 무슨 생각하실까 살아본 적 없으시니 몸이 한줄기 연기가 되는 허망함을 모르시겠지


밥 짓는 연기를 따라

내 몸이 한줄기 연기 될 때


마중 나오시면 아셨냐 물어봐야지

빈 괄호처럼 나 아팠다고



릴케의 시를 읽으며 떠올렸던 저녁노을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소박한 마을이 떠올랐다.

'연기'라는 이미지가 연상되는 비슷한 시가 있었나 해서 찾아봤는데 없었다.

기묘한 일이다. 그렇지만 분명 떠오른 건 릴케였다.


화장터에 가 본 적이 있다.

화장터에서 피어오르는 희뿌연 연기도 본 적이 있다.

그 허망함을 느껴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한줄기 연기가 될 그 언젠가를 그려보았을까.


빈 괄호처럼 나 아팠다고

이 마지막 구절은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그래, 삶의 아픔은 이런 거였구나 싶어서.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 속에서 헤맨다는 건

빈 괄호처럼 아픈 거 구나.




유수연 시인의 시는

삶에 대한 다정함, 사람에 대한 다정함이 담겨 있다.

그것이 늦게 알아차린 철 지난 감정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시 한 편에 담아두는 그 다정함이 좋았다.


괜찮다는 말 없이

괜찮다고 말해주는 시여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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