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올리버 산문집 <긴 호흡>
여러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확실히 문장의 호흡이 다르다는 걸 느낀다. 자연의 호흡과 도시의 호흡으로 쓰인 문장은 단어의 선택부터 속도감까지 분명히 다르다.
메리 올리버는 확실히 자연의 호흡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와 산문을 읽으면 대자연의 품에 안긴 듯한 기분이 든다. 저 멀리에서 바라보면 삶의 문제들은 아주 사소하고 작아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생명의 이야기와 삶의 풍경은 여전히 경이롭다. <긴 호흡>은 그녀가 남긴 짧은 글과 메모들을 모은 책이다. 시집만 읽었을 때는 굉장히 풍부하고 명확한 언어를 쓰는 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산문을 읽다 보니 그런 표현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기꺼이 자연 그리고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고, 시어들을 길어 올리기 위해 꾸준히 관찰하고 부지런히 써왔다. 하루아침에 쓰인 시들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긴 호흡>은 작가의 백스테이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자연의 호흡은 느긋하고, 권태롭고, 광활하고, 세심하다. 자연의 호흡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는 모든 산과 나무, 구름 조각, 새가 모두 다르게 느껴진다. 그들이 선택하는 엄청난 이름의 종류들도 그렇고 묘사에는 개별성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전체적인 글은 자연과 생명이라는 큰 품 안에 안겨있다. 그곳에서 지엽적인 묘사로 광활한 그림을 그려내는 데 천부적인 감각이 드러난다. 어느 정도의 기술력도 있겠지만 새 이름이나 꽃 이름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그것들의 개별성을 직관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몸이 아니면, 그런 시선이 아니면 그런 글을 완성도 있게 써내기 쉽지 않다. 그저 의미 없는 세부 항목들의 나열이나 맥아리 없는 붕 뜬 소리가 될 뿐이다.
반면 도시의 호흡은 성마르고, 서두르고, 정신없고, 돌진하고, 예민하다. 어딘가로 향해 빠르게 향한다. 그 목표 지점까지 가는 동안 풍경은 선택적으로만 보인다. 필요한 정보,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들 속에서 내가 포착해야 하는 것, 나에게 필요한 것들만 빠르게 포착해서 묘사한다. 잠시 멈춰서 광고판을 들여다보는 일은 없다. 0.3초 만에 지나가며 스캔한 후 다리는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고와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다. 늘 그 엇박자 속에 도시의 호흡을 가진 작가들은 부지런하게 움직이면서 생각도 팽팽하게 돌아간다.
솔직히 나는 멋진 자연 풍광을 보면 와-하고 감탄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지루해져 견딜 수가 없다. 그 산이 그 산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도시의 호흡으로 쓴 글들이 더 편하게 읽힌다. 익숙한 생활환경이 도시이기 때문인 것 같다. 수많은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 갇혀 살고, 보이는 풍경은 단조로운 편이다. 새의 이름도 나무의 이름도 구분할 수 없지만, 수천 가지의 립스틱 색상이나 수십 가지의 음료와 디저트 종류에 대해서는 꿰고 있다. 숲 속에서 길을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대중교통 환승하는 복잡한 경로는 잘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수많은 도시들의 공기를 사랑했다. 조나단 라슨, 비비언 고닉, 키미와 타이투스의 뉴욕, 프랑수아즈 사강의 파리, 다자이 오사무와 마스다 미리의 도쿄. 그리고 그 호흡의 배경이 된 명사와 동사들을 가지고 싶었다. 틱틱붐 속 조나단의 뉴욕 아파트가 갖고 싶었고, 비비언 고닉처럼 날카롭고 명료하게 글을 쓰고 싶었고, 키미처럼 뭐든 긍정적으로 대처하고 싶었고, 프랑수아즈 사강처럼 낭비하고 싶었고, 마스다 미리처럼 글을 쓰며 소소한 일상을 살고 싶었고, 다자이 오사무처럼 돈을 빌리고 싶었고,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달리고 싶었다. 그들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애초에 나와 공명하는 모습이 있었기에 그들을 품으로 껴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엉망진창인 모습은 그 조차도 빛나보였다. 나머지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만큼 찬란한 걸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걸 가지면 최악의 나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분명 나와 닮아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가진 것들 중 하나씩만을 바랐을 뿐인데, 나도 그들과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전혀 모르겠어졌다. 완전히 투명해졌다. 어떤 프로젝트든, 글이든 레퍼런스, 인용문이 먼저 더 길어졌으며 내 문장이 쓰일 자리는 점점 더 좁아졌다.
언어, 문화를 배우고, 연습하고 무엇보다 끝내주는 상상력만 있으면 그 호흡의 문장들을 써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언젠가 완전히 다른 호흡의 문장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작가라면 응당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읽고 쓰며 깨달은 건 숨을 쉰다고, 언어를 안다고, 모든 호흡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은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의 호흡만 할 수 있다. 작가란 모든 호흡을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호흡으로, 자기만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그걸 쓰는 사람이다. 그래야 살아 숨 쉬는 문장을 쓸 수 있다.
그러니 나는 나의 호흡을 찾으면 된다. 지금 숨 쉬고 있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쓰면 된다. 나에게 뭘 쓰고 싶은지 묻고, 그걸 바지런히 쓰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급함이 사라지고, 일단 첫 문장을 내뱉을 용기를 준다. 그 숨의 시간이 쌓여서 언젠가 엉망진창인 삶도 빛나 보이는 문장이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