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인더에 더 투자하세요...
커피의 맛은 개인마다 맛에 대한 감각이 차이가 나고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이게 정답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커피와 관련해서 모두가 동일하게 그리고 정답처럼 말을 해주는 부분이 있다.
Q : 홈 카페를 한 번 만들어 볼까 하는데요. 어떤 장비들을 구매하면 될까요?
A : 생각하는 예산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다르지만 예산 중에 그라인더에 더 많이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찾아보세요.
처음 이런 대답을 들으면 약간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는 홈카페는 물론 매장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기준이다. 외제차 한 대 가격과 맞먹는 하이엔드급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이기보다는 조금은 머신의 급을 낮추고 그라인더에 더 투자를 하는 게 본인이 원하는 커피 맛을 더 잘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여름 이적 시장의 자금이 한정적인 상황에서 스트라이커와 미드필더의 보강이 필요하면 전체적인 경기를 조율할 수 있는 미드필더에 더 많은 자금을 배분해서 세계적인 선수를 데려오는 게 더 합리적인 구단 운영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개인적으로 카페에 가면 머신을 보기는 하지만 그라인더로 어떤 것을 사용하는지 확인을 꼭 한다. 물론 좋은 그라인더를 쓴다고 무조건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라인더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원두를 커피 추출 기구에 맞게 알맞은 굵기로 분쇄하는 과정을 그라인딩이라 한다. 원두를 분쇄하기 위해서는 그라인더 안에 원두를 가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버(Burr)라고 부른다. 이 버의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그라인더의 타입이 구분이 된다. (롤러 형태도 있지만 이는 대형 생산 공장에서 사용하는 그라인더라서 제외)
칼날이 원뿔 모양인 것을 코니컬 버(conical burr), 평평한 모양인 것을 플랫 버(flat burr)라고 부르는데 매장에서 주로 사용하는 형태는 플랫 버 그라인더이다. 그렇다고 매장에서 코니컬 버 그라인더를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최근 트렌드가 플랫 버 그라인더에 잘 맞아서 플랫 버 그라인더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런 차이는 두 방식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 때문인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분쇄도에 대해서 간단한 이해가 필요하다.
너무 복잡해 보이는 그래프 같지만 내용을 이해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으니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라인더 분쇄도 관련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자료 중 하나인데 그라인더 브랜드 별 분쇄 분포도를 나타낸 그래프이다. 좌측 상단이 그라인더 브랜드를 색으로 구분한 설명이고 X축은 분쇄된 원두의 크기를 Y축은 그 크기의 분쇄된 원두가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낸다. 그라인더마다 어느 정도 크기로 원두를 분쇄할지 조정하는 다이얼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숫자가 작을수록 가늘게 클수록 굵게 분쇄가 된다. 이번에 배우면서 처음 알게 되고 놀랐던 건 필터 커피 내리기 위해서 분쇄도를 다이얼 4에 맞춰서 분쇄를 해도 실제로 분쇄된 원두를 크기가 다른 고운 채로 걸러서 분류하면 의도했던 사이즈로 분쇄된 원두의 비율이 높기는 하지만 위에 그래프처럼 정말 다양한 크기로 분쇄된 원두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래프에 높게 치솟은 부분을 peak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그라인더들의 분쇄 분포도는 가장 높은 Main peak 가 있고 2nd peak를 가지게 된다. 좋은 그라인더라고 함은 의도된 굵기로 원두가 잘 분쇄가 되어서 이 main peak 가 높고 좁아야 한다. 이래야지만 안정적인 커피의 맛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플랫 버 그라인더가 코니컬 버 보다 많이 사용되고 있는 추세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라인더에 더 많이 투자를 하라고 대답을 해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커피의 맛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고르게 의도한 크기로 커피를 분쇄해야지만 제대로 추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쇄의 분포가 정상적이지 않다면 바리스타가 아무리 일관성 있게 레시피에 맞춰서 에스프레소나 필터 커피를 추출한다고 해도 매번 맛이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매장에서는 대부분이 이런 것에 대한 인지를 하고 있어서 좋은 그라인더를 사용하지만 홈카페를 즐기는 커피 애호가들이 매장에서 원두를 사서 집에 와서 마셔보면 다른 맛이 난다고 하는데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는 게 그라인더의 영향인 것이다. 주변에 원두를 사서 집에서 커피를 추출해서 즐기는 분들이 있다면 그라인더를 어떻게 선택했는지 물어보길 바란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가격대에 맞춰서 그냥 구매했다고 한다면 반드시 그라인더를 교체하라고 조언해 주길 바란다.
대표적인 코니컬 버 그라인더로는 요즘도 매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매저 로버(Mazzer Robur)가 있는데 위의 그래프에서 main peak가 가장 낮고 폭이 넓은 분쇄 분포도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분포도가 상대적으로 플랫 버 보다 고르지 않다는 게 코니컬 버의 단점이다. 하지만 원두를 분쇄할 때 칼날(burr)의 회전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고 (약 400~500 rpm) 이 이유로 칼날에서 발열 덜 발생하고 마모도 적어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원두 분쇄 크기가 의도와는 다르게 폭넓게 나와서 코니컬 버 그라인더의 세팅을 잘 잡으면 더 풍성한 커피의 향미를 추출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이와 반대로 플랫 버의 경우 분쇄도가 상대적으로 고르고 높은 회전 속도로 (약 1500 rpm 정도) 빠르게 분쇄가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연속해서 분쇄를 할 경우 발열이 발생해서 원두의 향미에 영향을 줄 수가 있고 칼날의 마모도 더 빨리 되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매장에서는 정말 다양한 플랫 버 그라인더들이 있지만 스페셜티 커피 매장에 가면 꼭 볼 수 있는 그라인더를 소개하려고 한다. 독일의 말코닉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EK43(높이가 짧은 버전은 EK43s로 불린다)이라는 플랫 버 그라인더이다.
발표가 된지는 조금 된 모델이지만 일단 그라인더 디자인이 독특하고 이뻐서 매장에서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이 그라인더가 커피 업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건 2013년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쉽 준우승을 차지한 호주 출신 바리스타 맷 퍼거가 이 장비로 시연을 하면서 이다. 위에 분쇄 분포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EK43은 다른 플랫 버 그라인더와 비교해서 독특하게 2nd peak가 높게 나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맷 퍼거가 이 점을 활용해서 에스프레소에서 더 풍부한 커피의 향미를 느낄 수 있는 시연을 하면서 이 그라인더가 업계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세팅을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정말 커피 센서리가 좋은 바리스타가 사용해야지만 이런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 맷 퍼거는 이 그라인더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시연을 했지만 실제 매장에서는 필터 커피를 추출할 때 이 그라인더를 사용한다. 이유는 이 그라인더가 가지고 있는 단점이 많기 때문이다. 자동 그라인더는 분쇄 시간을 조정해서 매번 같은 양의 원두를 분쇄할 수 있지만 EK43은 매번 원두량을 계량을 하고 분쇄를 해야 한다. 그리고 포터 필터에 분쇄된 원두를 바로 담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어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려면 분쇄된 원두를 컵에 받고 그걸 다시 포터 필터에 깔때기 같은 보조 장비를 끼우고 담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런 이유로 매장에서는 빠르게 작업을 할 수 없으니 주로 필터 커피를 내릴 원두를 분쇄할 때 사용하는 형태로 정착이 되었다. 그래도 종종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EK43으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주는 카페가 있기는 하다. 다음에 카페에 가서 EK43 그라인더를 본다면 바리스타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 분들이 EK43을 사용하기에는 부담이 되는 가격이어서 홈카페용으로 그라인더를 고민한다면 현재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수동 그라인더로 코만단테라는 그라인더가 있다. 독일의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만든다는 이 그라인더는 분쇄 분포도가 전동 그라인더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여서 많은 전문가들이 추천을 하는 그라인더이다.
실제 커피를 카페에서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분쇄도를 이렇게 자세하게 알 필요까지는 없지만 직접 커피를 내려서 마시게 되면 커피 맛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라 조금은 길게 이야기를 한 것 같다. 홈카페를 만들 계획이 있다면 꼭 그라인더를 꼼꼼히 챙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