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개인적인 기억이 가진 보편적인 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영화평을 할 때 쓰는 말 중에 싫어하는 표현이 있다. 바로 ‘영화제용 영화’라는 말이다. 언제부터 이런 말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재미없지만 비평가들이나 영화를 조금 본다고 뻐기고 싶은 사람들이 좋다’라고 평가를 내리는 영화들에 대해서 대놓고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을 때 종종 사용되는 표현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처럼 정말 ‘영화제용’ 영화를 말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제’에서가 아니면 극장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영화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미국’ 영화 <미나리>는 후자에 속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번 주 멀티플렉스를 통해서 대규모 개봉을 했다. 많은 영화들이 개봉을 꺼려하는 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이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언론을 통해서 이 영화에 참여한 윤여정 배우의 다수 영화제 수상 소식이 다루어지면서 대중의 관심이 차츰 커져간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고 이 영화가 다시 한번 미국 '로컬'영화제인 오스카를 수상할 것인가 하는 ‘국뽕’이 약간 가미된 관심 한몫을 하고 있다.
하지만 <미나리>라는 영화는 상당히 독특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나라 대중에게 이제는 예능을 통해서 더 인지도가 올라간 배우인 윤여정 씨가 그리고 젊은 연기자 중에 가장 주목받고 있는 배우 중 한 명인 한예리 씨가 우리나라 말로 연기를 한 영화이지만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미나리>는 ‘미국’ 영화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국적을 구분하는 방식이 여럿 있지만 상업영화를 기준으로 제작비를 어떻게 마련했는지가 가장 중요한 판단의 잣대가 된다. 이 기준으로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미나리>는 엄연히 '미국' 영화이다. 하지만 이번 골든 글로브에서 이 영화는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정확한 상의 명칭은 Best Motion Picture-Foreign Language이다.) 골든 글로브에서 후보의 기준을 어떻게 정하는지 더 자세히 알아볼 생각까지는 없지만 단지 영화에 등장하는 언어가 한국어라는 이유만으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여했다면, 작년에 <기생충>이 이 상을 받지 못한 게 말이 안 되니 말이다. 아무튼 <미나리>는 브래드 피트가 이끄는 제작사 'PLAN B'에서 제작을 하고 한국 교표인 미국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한 한국 이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배우와 우리나라 배우가 협연을 한 미국 영화이다.
영화는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린다. 한국 이민자가 거의 살고 있지 않는 아칸소 주에 새롭게 정착하려고 하는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부부와 이들의 남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들 가족을 돕기 위해서 한국에서 온 외할머니 순자(윤여정)가 한 공간에서 살면서 일어나는 일을 덤덤하게 보여준다. 자신만의 농장을 만들려는 아버지, 병아리 감별사를 하면서 어떻게든 가족을 꾸러 나가려는 어머니, 무심한 듯 하지만 가족 옆을 지켜주는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그리고 가족 중에 가장 영어를 잘하는 것 같은 큰 딸과 귀엽지만 씩씩해 보이고 싶은 심장병을 앓고 있는 막내아들이 이 가족의 구성원들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이민자 가족이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느낄 수 있겠다. 그래서 이민자의 삶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없을 것 같은 예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감정은 지극히 보편적인 가족 구성원의 이야기이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미국 주류 영화 시장에서 이 영화가 계속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민자의 삶을 주목하게 되는 어쩌면 포스트 트럼프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미국의 상황과 잘 어우러졌을 수도 있지만 그 보다 가족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크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각각의 세대가 보여주는 이야기와 연기가 여러 나이의 관객들에게 한 번은 경험해 봤을 만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어깨를 누르는 삶의 무게라던지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고민이라던지 그리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철부지 같은 모습이지만 그래도 딸을 생각하는 할머니라든지. 그리고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남매의 시선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나이 때가 어떻던지 간에 이런 이야기들의 어느 한 요소들이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영화의 모든 에피소드는 감독 개인의 어릴 적 기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느 날 영화 일을 그만두고 교육자의 길을 결심하고 있던 정이삭 감독이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하고 앉은자리에서 본인의 기억에 남은 기억들을 글로 적었다고 한다. 한참을 적고 나니 80개 정도의 어린 시절 기억들이 정리가 되었고 이를 뼈대로 해서 지금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안에 모든 씬의 촬영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정말 오랜 기간 준비를 하고 긴 기간 동안 촬영을 하는 영화들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순간 정말 이런 영화 같은 순간이 있는 것 같다.
또 하나 이 영화에 관련되어 이슈인 것은 윤여정 배우의 수상 소식일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연기 생활을 하면서 받았던 상의 수보다 이 영화를 통해서 받은 상의 수가 더 많을 정도로 수많은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고 있는 중이다. 여러 사람이 예상하듯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윤여정 배우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 특히 극 후반부에 이야기의 변곡점을 만드는 부분의 연기가 전반부의 연기와 대비되면서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닌가 한다. 요즘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으로 배우보다는 예능 하는 배우로 인지하는 대중들이 더 많이 있겠지만 운여정 배우는 데뷔 때부터 해외에서 주목을 받았었다. 한국 영화계에서 천재 감독이라고 존경받는 연출가인 김기영 감독의 <화녀>를 통해서 데뷔했는데 이 영화를 통해서 1971년 스페인 시제스 영화제에서 Best Actress 상을 받은 기록이 있다. 90년대 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기영 감독의 회고전을 하면서 다시 김기영 감독의 영화와 윤여정 배우의 연기가 재조명된 적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부부를 연기한 스트븐 연과 한예리 배우의 연기가 더 울림이 있었다. 스티븐 연의 한국어 연기가 어색하다는 말들이 조금은 있기는 하지만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는 '미국'영화이니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 영화를 관람할 외국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전에 출연했던 한국 영화 <버닝>에서의 한국어 연기와 비교하면 정말로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부부가 서로 가족의 위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그 방식이 달라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감독의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진 이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 아닌가 한다.
언제나 3월 즈음이 되면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영화들이 극장에 많이 개봉을 했었다. 이는 매년 우리나라 극장가가 가장 힘든 시기인 봄을 견디는 전략 중 하나였다. 긴 겨울을 지나온 사람들이 봄이 되면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야외 활동을 선호해서 극장과 같이 실내에 어두운 곳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어서라고 한다. 코로나 시대 이후 이제는 극장 개봉을 하는 게 어쩌면 자살 행위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많은 스크린을 통해 개봉한 영화 <미나리>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