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그 어색함에 관하여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

by 도드리

결혼한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 시가가 편안하지 않다.(미안, 남편...)


첫번째로 말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 시부모님은 무척 좋으신 분들이라는 것이다.

나의 시가는 정이 넘치고 따뜻한 집안이라, 남편의 다정한 성품이 어디에서 왔는지 능히 짐작케한다.

셋이나 되는 시누 형님들도 다 정 많고 재미난 분들이다.

온 가족이 모이면 너나할 것 없이 웃고 즐겁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개인적인 예민함에 기인한 것이라고 해도 별로 할 말은 없다.


나는 결혼을 함으로써 원래는 한 가족에만 속하던 것이, 세 가족에 속하게 되었다.

하나는 원래 엄마 아빠와 함께였던 원 가족, 하나는 남편과 결혼하여 꾸린 새로운 가족,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남편의 엄마 아빠 누나들의 가족.


앞의 두 개는 쉽게 받아들였는데, 마지막 한 개는 아무래도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결혼을 하여 며느리가 되었으니 으레 기대되는 일들-명절, 생신 방문, 가끔 전화 통화, 아이를 낳고는 아이 사진 보내기, 각종 경조사 챙기기- 등에 딱히 거부감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대단히 잘 하지는 않았지만, 뭐 또 그렇게까지 못 했냐하면 그건 또 아닌...

그저 찾아보면 예쁠 것도 있고, 미울 것도 있는 그런 며느리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가 방문이 예정된 날이 다가오면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는다.


시가에 가면 나는 여러 종류의 나 중 며느리로서의 나를 꺼내는데, 며느리로서 존재하려면 원래의 나를 꽤 많이 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숫자로 표현하자면 이런 느낌일까.


딸로서의 나 - 원래 나 98%

엄마로서의 나 - 원래 나 95%

아내로서의 나 - 원래 나 80%

친구로서의 나 - 원래 나 75%

일터에서의 나 - 원래 나 20%


며느리로서의 나 - 원래 나 ??%


누가 며느리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강요한 적도 없건만, 시가에 가면 나도 모르게 입은 다물고 부엌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원래 내 성격은 이런 게 아닌데!

시누 형님이나 어머님이 피곤할텐데 들어가 쉬어라, 하고 등 떠밀면 못 이기는 척 방에 들어와 앉아 있어도 어쩐지... 이러면 안 될 것 같고 그런 기분.

식사 시간이 되면 어머님은 부엌에서 시누 형님과 식사 준비를 하신다. 기타 다른-아버님, 남편, 아이들, 아이 고모부들- 가족 구성원들은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눈치껏 부엌을 오가며 음식이며 수저를 나르고, 상을 닦고,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여기가 내 집이었다면, 여자들은 식사 준비를 하고 남자와 아이들은 앉아 있다가 먹는 일은 없었으리라.

엄마가 아직 부엌에서 음식을 다 내오지 않았고,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엄마를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음식을 먹고 있는 일도 없었으리라.

혹은 내가 이 집의 딸이었다면, 적어도 그렇게 앉아 있지만 말고 좀 거들라고 내 의견을 내기는 했겠지. 아니면 거리낌 없이 나도 소파에 앉아서 날라져오는 음식들을 기다렸다가 받아 먹었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먼저 먹고 있는데 나는 부엌에서 할 일이 더 없나를 살피면서 뒤늦게 식탁으로 가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밥 먹는 순서로 서열을 따지자면 1. 아버님과 아들과 사위들 2. 아이들 3. 딸들...과 며느리? 4. 어머님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며느리인 나는 입을 다문다.

이것은 이 가족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 문화를 만든 사람은 시부모님이고, 그 분들은 그 분들의 가정을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 모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 이것은 이러하니 옳고 저것은 저러하니 그르다고 하겠는가? 어느날 갑자기 가족이랍시고 나타나서?

(심지어 우리 어머님은 나에게 음식이나 설거지도 전혀 시키지 않으신다. 밥만 넙죽 받아먹기 민망해서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잽싸게 당신이 수세미를 낚아채시기 때문에, 그릇이라도 하나 닦으려면 내가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까 시가에 가면 며칠 동안만, 잠시만, 내 생각과 의지와 상관 없는 어떤 문화에 잠자코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직장과 몹시 비슷하다. 하지만 오히려 직장에서 적당히 기존 질서에 따르면서 내 의견을 내서 일을 진행시키고 하는 과정이 수월했다.)


그게 아무래도 원래 살아온 삶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기'를 실천하질 못 하는 것 같다.

친정 엄마는 이런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몹시 꾸짖으셨다.


"몇 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그러면 어떻게 하니! 네가 알아서 잘 적응해야지!"


나는 나름대로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보기엔 영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무 소리 않고, 서열...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눈치껏 잘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불편한 것을 어찌하나.


원래의 나, 진짜 나를 반의 반이라도 드러내자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질서와 문화에 도전하는 꼴이 될 테다.


시가의 문화는 그곳에 속한 구성원 중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심지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데, 이방인에 불과한 내가 어째서 기존 질서에 도전해야 하나.

게다가 어머님은 그 인품으로 스스로 서열의 가장 낮은 자리에 가셨으며, 내게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막아주시기까지 하는데.


그래서, 나는 아무 말 안 한다.

그리고 시가에 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스스로를 누른다.


이 정도는 갈등 거리도 아니라고.

시부모님이 잘 해주시니 별 생각을 다 한다고.


하지만 속마음은 아무래도 다르기 때문에, 나는 시가에 가면 마치 무대 위에서 음악에 딱딱 맞추지 못하는 꼭두각시처럼 어색하게 있다가 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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