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을 필요는 없지만 듣기엔 재미있는 에피소드
짐 1
한 할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리고 대뜸 이렇게 말한다.
"나 잠깐 앉았다 가게."
"네?"
"잠깐 앉았다 가야 되겠어."
"네? 아니, 그건···."
"아이고, 여긴 뭐 하는데요?"
"제가 직접 만든 디자인 상품들 파는 곳이에요."
"오늘 내가 짐이 많아. 여기서 좀 쉬었다 가야 돼."
밖을 보니 지하철 역 벤치가 텅텅 비었다. 다리가 아프거나 짐이 무겁다면, 잠깐 앉아서 쉬었다 갈 공간은 저기가 아닐까? 여긴 엄연한 영업장인데···. 뭐라 말을 하면 속 좁은 젊은이가 되겠고, 이미 앉은 사람 일으켜 내보내기도 뭐 해 그냥 입 다물고 있는다.
약 5분 경과 후.
"아이고, 이제 가야지. 영차."
"안녕히 가세요."
트로트 마왕
어디선가 아주 큰 트로트 자락이 들린다. 이야, 진짜 소리 크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매너 없이 음악을 듣지?
밖을 보니 한 할아버지가 핸드폰을 들고 어슬렁 거리고 있다. 제발 나가서 들으시면 안 될까요. 여긴 지하라 소리가 엄청 울린다고요. 소음에 짜증이 일기 시작해 할아버지를 보는데, 젠장. 눈이 마주쳤다. 이후 내게 남은 단 하나의 생각. 제발 오지 마라, 제발 오지 마라, 제발 오지 말아라···. 내 바람과 달리 안 그래도 무진장 큰 트로트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안돼, 여기로 오고 있다. 이윽고 냄비로 두개골을 치는 듯한 번쩍번쩍 불쾌하게 큰 소리가 매장 안을 가득 채운다.
"아이고, 그림이 있네."
"어서 오세요."
나한테 말 거는 소리가 잘 안 들린다. 트로트가 너무 크다. 심지어 이젠 따라 부르기까지 하신다.
"그림들이 좋네. 근데 좀 크게 그리면 어떤가?"
"네?"
"저 벽만큼 큰 그림을 그려. 내가 그런 그림을 어디서 봤더라? 저기 뭐냐 저, 어디 미술관이 있는데. 뭐더라? 어디더라? 용산인가 어디, 거, 아무튼. 거기에 먹물로 그린 엄청 큰 그림이 있어. 그거 보니까 나도 그릴 수 있겠던데. 사이즈가 크니까 압도하는 맛도 있고."
"아, 네." 할아버지, 그 핸드폰 노래 좀 끄시면 안 될까요.
엄청난 볼륨의 음악도 날 괴롭혔지만, 더 께름칙한 기분이 든 건 할아버지의 시선이다. 잠깐씩 말을 멈추고 아주 그윽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는데 그 시선이 별로 달갑지 않다. 내가 무언가 대답하면 듣지 않고 계속 쳐다보는데 좀 불쾌한 기분이다. 배경음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고성의 트로트 자락.
할아버지는 30분이 넘도록 앉지도 매장을 둘러보지도 않는다. 나를 뜯어보거나 노랫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본인 이야기를 하신다. 어르신이 말을 하시니 말을 막지도, 무시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어찌어찌 대답을 한다. 내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른다.
한참을 있다 겨우 떠난 할아버지. 머릿속이 웅웅 울린다. 진이 다 빠진다.
바나나 우유
"아이고, 이것 좀 맡길게요."
"네?"
"내가 이걸 샀는데, 지금 어딜 좀 가야 돼서요. 이것 좀 여기다 맡기고 갈게요."
할머니에 가까운 한 아주머니가 검정 봉지를 내민다. 꽤 묵직한데 보니까 빙그레 바나나 우유가 한 일곱 개 들어있다. 아니, 여기가 무슨 물품 보관소냐고요.
"죄송해요. 여기 물건 못 맡아드려요. 혹시나 상할 수도 있고 여긴 뭐 보관해 드리는 곳이 아니에요."
"그럼 이거 하나 먹어요. 그럼 괜찮지?"
"아뇨, 아뇨. 물건은 저기 물품 보관함에 맡기세요."
"여기 냉장고 없어요? 아, 저기 있네! 저기 잠깐 넣어두면 되지." 아주머니는 내 손에 들린 봉지를 낙아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간다. 어느새 냉장고를 열고 자신의 바나나 우유 뭉치를 넣으려고 한다.
"어, 어, 안 돼요. 여기 아무나 와서 물건 막 맡기시는 곳 아녜요. 제발 저기(물품 보관함)다가 맡기세요."
"내가 잠깐 어디 다녀와야 돼요. 이거 우유 하나 먹어요. 이거 막 먹어도 돼요."
이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문으로 간다.
"아니, 제발. 하···. 이거 상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전 몰라요."
"어, 괜찮아요. 상해도 돼. 하나 먹어요." 이미 문 밖을 나서고 있다.
"언제 오실 건데요?"
대답은 없다. 사람도 없다.
한 2시간 후, 아주머니가 오셨다. 난 당연히 우유 하나 입에 대지 않았고, 정말 찾으러 오는 게 맞는지 걱정도 됐다. 이날 엄마도 같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찌나 막무가내인지 엄마가 말리고 안된다 했음에도 맡기겠다며 고집을 부린 거다. 이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난 아주머니, 그녀의 억척스러움이 참 기억에 남는다.
이케아가 아닙니다
한 중년 여성이 급하게 들어온다.
"이거 얼마예요?"
"뭐가요?"
"이거, 책상이요."
"네? 이건 파는 게 아닌데요···."
"아, 이건 안 팔아요?"
"여긴 디자인 문구랑 액세서리 파는 곳이에요. 여기 책상에선 모임이나 수업 해요."
"아, 그렇구나."
심지어 구청 물건이라 가격도 모르고, 구입처도 모른다. Hej! 잠깐이지만 이케아가 된 것 같았다.
분실물
한 남자가 후다닥 들어온다.
"이거 옆에 프린트 가게에 누가 두고 갔어요. 주인 좀 찾아주세요. 여기다 두면 가지러 오겠죠."
"네? 아, 이거 그냥 있던 자리에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에이, 사람 있는 데 두는 게 낫죠. 주인 찾아줘요."
남자는 올 때처럼 급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내 손에 남은 주인 잃은 휴대폰 하나.
당황스러웠다. 휴대폰은 고가의 물건이라는 점은 차차 하더라도 워낙 개인적인 물건이니까 웬만해선 남의 것에 손대고 싶지 않다. 더욱이 주인 잃은 물건을 집는 순간 내가 습득자가 되므로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어떤 물건을 주웠다면 보통 경찰서에 갖다 주지 않나? 하다 못해 물건을 주운 공간의 가장 공적인 장소나 담당 센터 등을 찾아가지 않나···. 전에 길바닥에서 체크카드 한 장 주워 인근 경찰서에 전달한 적이 있다. 주인이 경찰서에 가서 찾았다며 너무 감사하다고 스타벅스 쿠폰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의 문제는 내가 경찰도, 역무원도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온기가 돌지만 워낙 흉흉함 쪽으로의 변화가 빠르다 보니 선의로 베푼 일이 큰 재앙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자꾸 경직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 던져진 휴대폰 하나.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된다. 이걸 내가 어째야 돼? 괜히 주인 찾아준다고 열어서 잠금 해제 시도하고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아니, 이걸 어떡한담? 주인이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으로 두고 온 곳에 찾으러 올 수도 있으니 이대로 두고 퇴근할 수도 없고···. 한 10분째 고민하고 있는데, 그 분실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저 그 핸드폰 주인인데요. 혹시 누가 가지고 계시는 건가요?"
"아까 어떤 분이 프린트 카페에서 주웠다고 저 주고 가셨어요. 그 프린트 카페 옆에 있는 소품샵이에요."
"아, 네. 감사합니다. 바로 찾으러 갈게요."
젊은 여자분이 오셨다. 핸드폰을 찾아서 얼마나 다행이실까. 근데 핸드폰 주인을 빠르게 찾아서 제가 더 다행이에요. 분실을 일찍 자각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기 사람 있어요
한 중년 여성이 들어온다. 통화를 하고 있다. 통화 소리가 꽤 크다. 그녀는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대화를 들려준다. 아주 큰 소리로 수화기 너머의 상대와 대화를 나누며, 20분 넘게 매장을 돈다. 물건을 구경하기보다는 그냥 통화하며 왔다 갔다 하는 모양새다. 통화 소리가 너무 크다. 시끄럽다. 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어지럽지도 않은지 가게를 돌고 또 돌며 통화에 통화를 잇다가 마침내 나간다. 전화는 아직도 끊기지 않았다.
짐 2
"이것 좀 봐줘."
"네?"
"나 볼 일 좀 봐야 되니까 이거 좀 봐줘."
"네? 뭘··· 아, 짐은 여기다 맡기시는 거 아니에요. 저기 물품보관함에···."
저기요, 제가 말을 하고 있는데요. 할머니는 문 앞에 장바구니 카트를 덩그러니 세워둔 채 가버린다. 언제 오실지 나도 모른다.
쳐 받는다뇨
"밖에 있는 삼 천 원짜리 클로버 키링 어딨어?"
"여기 있는 것들이 다 삼 천 원이에요. 여기서 보시면 돼요."
"이 위에 있는 건 뭐야?"
"이건 유리 나뭇잎 참이 달린 거예요. 이것도 클로버긴 한데, 얘는 6천 원이에요."
"이까짓 걸 6천 원이나 쳐 받아? 참나."
어떤 물건을 얼마에 팔겠다 정하는 건 파는 사람 마음이고, 시장에 나와있는 가격을 지불하고 물건을 살지 말지 결정하는 건 사는 사람 마음 아닌가? 애초에 상품 하나 만드는데 들인 시간과 노력, 비용, 정성은 고객이 궁금한 것이 아니니 나는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이게 몇 개월 간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며 터득한 내 정신 건강 지키는 방법이다. 그리고 초면에 반말하며 '쳐-'와 같은 비하의 접두사를 붙이는 사람에겐 뭐라 설명해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할 터.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영상까지 만든 에피소드. 남에게 상처를 쉽게 줄줄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자세한 이야기는 영상에서 만나보는 걸 추천한다. 입은 밥을 먹거나 말을 하라고 달린 것. 똥을 싸라고 있는 게 아닌데.
추리고 추려 간단히 뽑아본 특이한 손님들. 극히 일부라는 점이 우습다. 가만히 있을 때는 모른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지. 그걸 경험하며 내가 얼마나 더 단단해질지 나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