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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변의 잡설 Sep 06. 2022

항속주행

좋은 중고차를 고르는 기준 중 하나가 바로 항속주행 여부다. 2대의 자동차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둘 다 출고된 지 만으로 4년된 차다. 한 대는 주행거리 4만킬로미터, 다른 한 대는 8만킬로미터다. 어느 차가 좋은 차일까. 정답은 '단정할 수 없다'라고 한다. 후자의 경우 비록 주행거리가 8만이나 되기는 하지만, 매일 8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항속주행을 했다면, 오히려 시내에서 가다서다를 반복한 차보다 노화가 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엑셀을, 낮추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는 행위를 반복할 때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시내주행이 잦은 차는 고속주행을 한 차보다 이러한 부담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중고차를 고르기 위해서는 주행거리와 관계없이 차에 부담을 주지 않는 주행을 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득 사람의 생에 있어서도 항속으로 움직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적 제약을 의식하지 않고 모든 걸 내려놓은 채 그저 내게 주어진 순간에만 천천히 집중하는 것이다. 이때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속도가 시속 30킬로든 50킬로든 110킬로든, 그 일정한 속도로 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 자연스레 동일한 주기, 동일한 박자에 맞추어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호흡이 일정해지고, 감정 기복도 줄어든다. 조금 더 빨리 움직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러한 생각조차 벗어 던지는 게 좋다. 어떠한 조바심도 도움되지 않는다. 그저 일관되고 꾸준하게 지각하고 움직이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러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도시의 삶 속에서 하루하루 퇴색해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항속주행이란 게 가능할까. 어려울 것이다. 내 상사가, 동료 부하직원들이, 가족들이 수시로 나를 찾는다. 24시간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정신은 산만해진다. 항속유지의 대전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내 자유의사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내 시간은 나의 것만은 아니다. 의뢰인들이 내게 돈을 지불하고 내 시간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현재 주어진 일정 속에서 항속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몸에 루틴을 각인시켜 놓을 수는 있다. 쏟아지는 과업에 맥박이 빨라지고 혼이 나갈 지경에 이르더라도, 기본적인 설정을 해두고 이를 꾸준히 루틴으로 반복한다면, 몸은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다시 평정심을 찾을 수 있다.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 방법은 다양하다. 기도가 될 수도 있고, 요가, 명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108배를 하고 일어났을 때, 영적인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걸 느낀다. 그때 책을 읽으면 종이 위 활자들이 문단 단위로 들어와 내 머리에 꽂히는 느낌을 받는다. 그 순간만큼은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았다. 인생에서 중요한 시험을 두어달 남기고는, 밤 8시면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뒤 108배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4시경 일어나 다시 108배를 하고 학교로 향했다.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안정적으로 호흡하며 주어진 과제를 소화해낼 수 있었다.




오늘만, 아니 당장 이 순간만 대강 수습하며 살겠다는 무신경함,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희일비하지 않는 의연함, 이 상태를 지속해나가는 꾸준함이 필요하다. 그냥 차분하고 무감각하게 당장의 1분 1초를 보내는 것이다. 자연스레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해 있을 거라 믿는다.




-- 사진은 2015년 엘에이 디즈니홀 앞에서 찍은 것.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두다멜의 표정은 극도의 몰입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였고, 오래도록 기억해두고 싶었다. 지금 와서 보면 이러한 몰입 상태야 말로 일종의 항속주행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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