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호민 작가와 소송 중인 선생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난제

좋은 사람 여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특정 행위를 판단하는 게 소송

by 이이진

예를 들어 높은 지위에 있는 상사가 저에게 성추행을 했다고 칩시다. 이 상사는 인정을 받는 사람이고 주변에 인망도 두터워서 저도 믿고 따랐는데 느닷없이 성추행을 한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 사람에 대해 해당 사건을 말하는 게 과연 쉽게 인정이 될까요? 아마 그 사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제가 뭔가 성추행 당할만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면서 저를 비방하고 그 사람을 오히려 두둔하겠죠. 왜냐하면 자기들에게는 좋은 사람이 맞으니까.


즉 이 사람은 성추행을 한 그 사람에게 나쁜 사람인 거지 모든 사람에게 나쁜 사람은 아닌 건데, 이 개념을 잡는 게 상당히 쉽지가 않습니다. 나한테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는 거를 잘 받아들이지 못해요, 인간이 원래 존재 자체가 주관적이라. 따라서 아버지가 자식을 성폭행해도 때로 이런 아버지를 두둔하는 어머니가 있는 것도 일종의 그런 맥락입니다. 이 사람은 나한테 좋은 사람이니까, 내 남편이니까, 자식인 너를 키워보니 네가 이상해서 그런 일을 당한 거다, 이런 입장이 되는 거죠.


즉 성폭행 행위 그 자체를 판단하지 않고 나의 관념과 주관, 의식, 경험과 입장이 포함된 채 판단을 하는 걸 인지를 못 하죠. 다른 사람이 보면 그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무리 아이가 잘못을 했더라도 성폭행을 놔두는 자체가 제정신이 아닌 건데, 그거를 아버지나 어머니는 스스로 판단 못 합니다, 그 지경이 되면. 때문에 경찰이나 양육 보호 기관, 이런 제3의 기관이 나타나서 부모를 잡아들이고 하는 겁니다. 아이 던져 죽인 사람들도 우울증 타령하고 잡혀가서도 죄를 인정 안 하는 걸 보면 인간이라는 게 참 뭘까 싶어 지는데요. 학대하는 부모들도 얘기 들어보면 다 똑같습니다. 아이가 밥 안 먹고 칭얼대고 뭐뭐. 세상 핑계 없는 무덤은 없거든요. 그런 일을 당할만해서 당한다, 이런 게 바로 가해자 관점이고요.


사실 박원순 시장이나 안희정 지사나 여전히 지지 세력이 하는 행동이 다 이런 쪽이고, 김건희 여사 두둔하는 쪽도 그런 식이죠.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닌데, 사건을 만든 사람이 유도한 건데, 왜 이 사람을 욕하느냐, 이런 입장들. 즉 나한테는 좋은 정치인이고 좋은 부인인데, 왜 그러냐는 식. 그래도 <정치인이나 권력자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정치인도 인간인데 누가 유혹하면 넘어간다>, 이런 입장으로 나뉘면서 사회까지도 분열되는 지점이 되는 거고요. 인간이 자기편이 되거나 자기가 좋게 보는 사람을 잘 비판 못 합니다. 부모나 지인처럼 가까운 사람이 객관화가 안 되는 게 뇌가 그렇게 구조화한다는 이론들도 있기도 하고요. 얘기가 다소 삼천포로 갔는데, 여하튼.


주호민 씨 입장도 따지고 보면 (다른 학생들에게 좋은 선생님일지 몰라도) 적어도 내 아이에게는 잔인한 선생이 맞다가 주요한 주장이었던 거고, 이거를 판단해 달라 재판부에 소송을 건 거죠. 따라서 <해당 교사가 좋은 교사인데 왜 그러냐>면서 시위하는 자체가 재판 주요 맥락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재판부가 한 일도 양 측 주장을 듣고 누구 입장에 서지 않고 (사실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데, 그나마 판사나 검사들은 이 교육을 주야장천 받고 직업적으로 계속 반복 수행해야 하니까), 교사가 인격적으로 잘못됐다 이런 인정이 아닌, 그런 행위는 교사로서 안 하는 게 맞다 정도로 결론을 내준 겁니다. 판결문 읽는 것을 잠깐 봤는데 재판부도 그렇게 인정하는 취지는 아니나 감정적인 표현인 점은 인정을 한 겁니다. 판사들이 판결문을 이상하게 어렵게 혹은 모호하게 쓰는 바람에 그렇게 잘 안 읽히는 데 그 내용입니다.


해당 특수 교사 또한 자신이 불필요하게 감정적이고 짜증 섞인 표현으로서 아동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음을 인정하고, 주호민 씨도 자신의 자녀가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면 어느 인간이라도 짜증이나 분노를 할 수는 있는 거라는 점을 인정했으면 이렇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겠죠. 결국 선생은 선생대로 해당 아동의 잘못된 행위에만 집착하여 <아동이 이 지경인데 그럼 나는 어떻게 하나> 이 지점에 머물러 있는 거고, 주호민 씨도 <아무리 애가 그렇더라도 선생이 그렇게 하면 되냐>가 첨예하게 맞서니 그 지점까지 간 겁니다.


따지고 보면 <아동이 그 지경인데 나는 어떻게 하나>와 <아무리 그렇더라도 선생은 그러면 안 된다>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 아니겠습니까? 그거를 일단 <선생은 그렇더라도 가능한 참아라>로 재판부가 입장 정리한 거다 보면 될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동의 잘못 여부를 떠나 선생과 같은 성인에게 책임을 더 지우는 것이 맞다는 입장이기 때문이죠. 정치인이나 권력자에게 더 책임을 부여하자는 입장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맥락입니다. 그게 되냐는 다른 문제이나. 한국이 이게 좀 강한 게, 한국은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성별을 바꾸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인 부모의 성적 욕구보다 아이의 성장이 더 중요하다는 게 재판부의 일관된 입장이기 때문에요. 트랜스 젠더 자살률이 어느 심리적 문제(라고 하면 또 뭐라고 할 텐데;;;;;;;) 보다 굉장히 높아도 재판부의 이 입장은 고수되고 있고, 다만 그 요건이 완화되는 지점이고요.


여하튼 이 문제를 예전에도 포스팅을 한 적이 있는데, 결국 이렇게 어른들끼리 싸움이 되고 나니까 정작 문제의 중심인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녹음기를 가져가는 결정을 내릴 때도 아이는 몰랐다고 하니까, 그럼에도 이 아이는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이 아이 때문에 장애아가 싫다는 악플부터), 주호민 씨가 원하는 게 자신의 아이가 장애가 있더라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오히려 아이에게 어울림에 대한 난제를 주게 된 거죠. 해당 아동은 장애도 있는데 심지어 자기 때문에 장애 아동 전체가 싫어진다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가야 하잖아요. 그게 주호민 씨가 원한 것이든 아니든, 아동이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 되는 거죠.


아마도 주호민 씨를 보면서 제가 느끼는 불편함은, 문제의 핵심인 자신의 장애 아이에 대한 접근법에 있는 거 같은데, 정작 아이 자체가 문제의 핵심에서 완전히 빠져 있는데 자신의 행위가 어떻게 아이를 위하는 것이라는 건지에 대한 의문일 텐데, 막상 또 저에게 장애 아이가 있다고 하면 어떤 마음일까 생각해 보면 그것 또한 접근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 같아서, 이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언급하겠습니다. 모쪼록 주호민 씨가 자신의 아이와 깊이 상의하고 이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인지시켜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하겠다는 그 간절한 욕망을 실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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