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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진 Jul 08. 2024

대중은 왜 새로운 리더를 뽑고 다시 같은 길로 유도할까

아무리 새로운 리더가 나와도 세상은 그대로인 이유 

대중이 항상 새로운 리더를 원하는 이유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봤더니 결과적으로 이렇더라는 문제의식이 발현된 탓일 겁니다. 즉 뭔가 새로운 리더가 뭔가 새롭게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한 바가 반영된 거란 거죠. 따라서 정치판이든 어떤 판이든 새로운 인물에 대한 대중들의 갈급한 요구는 지겹고도 끊임없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인물을 뽑아 놓거나 찾아 놔도 대중들은 그 새로운 인물이 지향하는 바가 어떤 구체적인 결실을 맺기도 전에 반대부터 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 하는 이상한 행태를 보입니다. 새로운 인물이니까 당연히 기존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지향성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기다리고 지켜보는 게 타당할 텐데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서 움직이는 것만이 마치 최선인 것처럼 안달복달하는 거죠.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였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고 결국 새로운 사람을 원하게 된 것은 자신 아닌가요? 그런데 왜 또 굳이 그 새로운 인물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들이려는 걸까. 자신의 방향이 옳았다면 굳이 새로운 인물은 필요하지가 않잖아요. 그 새로운 인물이 나쁜 길로 가는 게 아니라면 <단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지향성을 방해할 이유는 없는 거 같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 사람을 위하는 거라는 집착이 정말 옳은 것이었다면, 눈앞에 새로운 사람을 요구하는 자신은 완벽한 모순이 되는 거죠. 이미 옳은 데 뭘 또 새로운 걸 원합니까? 그대로 그냥 쭉 살면 되는 거지. 그 모순 속에서 자기는 그렇지 않다며 자기 위안을 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지칠 때가 있어요. 혐오까지 가면 안 되는데 저도 피곤할 때는 그 혐오가 치고 올라옵니다. 그냥 지켜보는 건데도 상당히 괴롭네요. 


뭐 꼭 저라는 건 아니지만, 만약 제가 그 새로운 인물이 된다거나 혹은 그 지향성으로 움직인다면 저는 제 앞에서 어떤 난리를 치더라도 제가 지향하는 바대로 움직일 거니까 굳이 스스로 비참해질 노력을 안 하셔도 될 텐데, 과연 이 말은 또 들을까 깊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해서 들을 사람들이라면 혐오감까지 남기는 구차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죠. 


그렇다면 저는 왜 제가 지향하는 바를 바꾸지 않을 거냐면, 지금까지 간 길들이 증오와 멸시로 이어진 지점에서 움직일 거기 때문입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증오와 멸시 그리고 배제가 고통스러운 그 지점에서 움직일 거라, 제가 이 지향을 바꿀 이유가 없는 거죠.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결국은 증오와 멸시를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 그렇게 살아온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만이 제 방향을 저지하려 들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스스로도 혐오에 빠지는 기분을 느끼는 것까지 막을 수가 없으므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아주 많이 괴롭죠, 그럴 때는. 다만 이 혐오나 우울, 극도의 지침으로 어떤 방향이나 지향을 결정하지 않도록 죽도록 연습하는 상태라는 것을 문득 토로하고 싶어 지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을 갖는 자체는 막을 수가 없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좋아하지만 훼손하는 사람들도 있고 싫어하지만 발전을 돕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연습하는 겁니다. 좋고 싫고 혐오하고 애증하고 갈급한다는 그런 걸로 지향을 지향하지 않도록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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