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인류가 인구 총량을 조절하지 않고 지금 상태로 계속 증가하기를 원한다면, 공공 지대가 확대될 수밖에 없고 마찬가지로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공간이 현저하게 줄어들어야만 할 겁니다. 즉 개인이 자동차를 소유하거나 거대한 주택을 소유할 수 있는 상황이 극한으로 제한돼야 하고, 결국 모두가 활용하는 공간에 대한 지배력과 투명성이 강화돼야 되는 거죠.
종종 미래 영화에서 최첨단으로 구성되어 누구나 감시가 가능한 원룸 형식의 기숙사가 그려지는 것은 어찌 보면 인구 총량이 줄어들지 않은 채 계속 인구가 늘어날 경우, 인류가 기술과 더불어 사는 모습을 은연중에 상상한 것이 반영된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가령, 스타트업 기업들 중에는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도록 식기 등을 제공하는 경우가 있는데, 해당 식기를 사용할 경우 환경오염에는 방지가 되나, 한 편으로는 식기를 통해 기업 (매장) 정체성을 나타내는 등의 활동이 불가능해집니다.
지금 페트병에 수거를 편리하게 하도록 상표를 붙이지 않게 하는 것도 사실상 보면 브랜드 정체성을 없애는 거죠. 같은 식기에서 벗어나 같은 옷차림, 심지어 공동생활을 침범할 수 없도록 예상되는 행동을 할 것 등이 인구 총량을 고려하지 않은 인류가 부딪힐 미래 중 하나입니다. 이 경우 지금과 같이 브랜드 정체성 위주로 수익을 내는 기업들이 대단한 혼란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배제되는 사회라는 것은 실로 거대한 실업으로 이어질 텐데, (아마도 몇 차 산업혁명으로 불리지 않을까 합니다. 10차면 좀 빠르려나?) 현명한 후대라면 예상하고 움직일 것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예를 들어 현대 사회로 오면서 부자나 유명인들이 거대한 독립적인 공간을 갖게 된 이유는 부의 과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신변 안전 때문인데 (미국은 유명인들이 일면식 없는 사람들에게 총 맞아 죽는 경우가 많았음, 한국도 측근이긴 하나 대통령이 총 맞은 경우가 있듯이, 이게 정당하냐 그렇지 않냐의 정치적 관점을 떠나서), 결국 이러한 부분이 해소돼야만 유명인이나 부자들, 그리고 지도자들이 대중들로부터 고립되어 고립무원에서 살면서 고통받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사회로 지향이 되겠죠. 아시겠지만 이런 미래를 상대적으로 불편한 것으로 표현한 영화들이 종종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나 인간은 남과 같으면서도 남과 다르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인류가 고도로 점차 더 지능화되면 될수록 본인의 자아를 독자적으로 추구하게 될 확률이 높고, 그런 상황에서 계속 개인의 독립적인 공간이 제한되고 반대로 공공의 공간이 확장돼야만 하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거죠. 즉 개인이 만족할만한 독자적인 공간과 재산을 소유하면서도 동시에 인구가 지금처럼 증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저는 생각하지 않으며, 뭔가를 희생해야 할 텐데, 아마도 그 부분은 공간이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들이 가족이나 지역사회 위주로 행해졌던 사회 서비스 (대표적으로 양육이나 돌봄)가 공공의 영역으로 가고 있죠. 지금은 서비스의 일부가 시작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국 청년들이 원룸밖에는 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도 이러한 경향이 이미 반영되고 있는 거고요. 한국뿐만 아니라 파리, 런던, 뉴욕, 홍콩, 도쿄 (심지어 베이징과 뉴델리조차도) 청년들이 개인 공간을 가질 수 없어 대부분 원룸에서 고독하게 삽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을 반대하여 다시 대가족으로 가자, 다시 돌봄과 양육을 가족의 영역으로 가지고 오자, 하는 움직임이 생길 수도 있으나, 이미 다양한 모습으로 확대된 가족의 구조를 포함하면서도 대가족으로 함께 살자고 해봐야 그 효용이 길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가족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 권리가 반드시 승계돼야 하고 가족 내 서열 관계 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게 그렇게 만만한 작업이 아닐뿐더러, 이미 다른 사람과 재혼한 가정, 아버지가 특정되지 않는 가정, 혼인하지 않은 가정 등등을 포괄하기에는 호적 정리도 쉽지가 않죠.
또 돌봄의 경우에도 이렇게 말하면 잔인하지만, 예전에는 아프다고 하면 그리 오래 살지 못해서 돌봄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죠. 그러나 지금은 병이 있는 채로 꾸준히 약물 치료를 받으면서 길게는 몇십 년도 살기 때문에 만약 부모를 돌보는 경우에는 청년이 젊은 시절을 모두 돌봄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자녀가 부모를 돌보고자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효율이 낮은 상황이 온 거죠. 이거를 잔인하다 이렇게 치부하자면 할 말이 없는 거고, 어떻게 현실적으로 접근할 것인가를 보면, 누구나 아파서 바로 죽기는 싫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특정 누군가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가 됩니다.
과거 조선에서 부모의 3년 상을 치를 수 있었던 것도 (제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 상을 치를 정도가 많지 않았을 거 같은데) 가족 중 한 명 혹은 다수가 상을 치르는 당사자를 대신하여 그만큼 노동을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서, 지금처럼 핵화된 개인의 시대에서는 불가능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겠죠. 형이 3년 상을 치를 때 동생이 대신 노역을 하며 형의 가족을 부양한다? 이게 가능하지가 않죠. 현실이.
따라서 현실에서 사는 개인이 행복한 사회가 돼야 한다 이렇게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이미 현대 사회에서 보이고 있는 인구 증가에 따른 복잡다단한 문제들부터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해결해 나가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