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스케치, 사랑을 닮은 36년의 풍경

머리칼 한 올에도 묻어나는 시간

by 박영미

거실에 따스한 햇살이 스며든 오후였다. 휴대폰을 보던 남편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이 70대 아버지를 살해했네. 부모의 오랜 갈등이 원인이었군. 가족이란 게, 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의 마음이 닿지 않으면, 그런 비극이 생기는 걸까요?... 관계는 돌보지 않으면 멀어지잖아요.”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기바리캉의 플러그를 꽂았다.

“그래도 우리야 다행이지. 고마워. 당신이 잘 견뎌줘서...”

나는 남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도 많이 애썼지요.”라고 남편 말에 답하며 식탁 위에 펼쳐진 명화집을 넘겼다. 빅토르 푸르베의 <가족>.


빅토르 푸르베, <가족 La Famille>, 1898. 오르세 미술관.

“여보, 이 그림 좀 보세요. 우리 젊은 시절부터 살아온 날들이 생각나네요. 남자 얼굴이 당신 젊었을 때랑 닮았어요.”

남편이 다가와 그림을 보았다. 노르스름한 바탕의 목탄과 파스텔 그림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림 속에서 한 가족이 서로를 감싸 안고 있었다. 남자는 소매를 걷어붙인 굵은 팔로 여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여인은 아기를 들어 올려 남편에게 기대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지만 남편을 향한 신뢰와 가족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검게 그을린 남자의 옆얼굴은 행복해 보인다.

남편이 그림 속으로 빠져들듯 말했다. 우리도 그랬지. 단칸방에서 아이 둘 키우며 힘들었던 시절. 그래도 행복했어.”


전기바리캉이 완전히 충전되었다.

“이제 시작해도 될까?”

나는 20년이 넘은 낡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남편에게 갔다. 빗과 가위, 전기바리캉을 번갈아 손에 쥐었다. 날카로운 기계 소음과 함께 나의 손놀림은 꽤 익숙하지만 조마조마한 솜씨이기도 하였다.

거실에서는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이 흘러나왔다. 음악은 마치 시간의 결을 따라 흐르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듯했다.

이내 여지없이 잘려 나간 머리칼은 무작위적인 조형으로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그 머리칼 안에 담긴 시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짙고 단단했던 머리카락은 이제 얇아지고 성글어졌다.

높고 날렵한 콧날, 또렷한 옆얼굴의 청년은 세월 속에 부드럽게 다듬어진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청년의 강인함은 사라졌지만, 대신 믿음직한 동반자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내 머리에 이게 뭐지?” 남편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가르며 나에게 보여주었다. “머리를 감아도 이상한 게 생기네. 미용사에게 보여주기가 창피하고 좀 꺼려져.”

남편은 두피에 생긴 각질로 인해 여러 차례 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조용히 말했다.

“여보, 나이 들면 다 그렇지요. 내가 당신 머리를 다듬어 줄 거예요.” 그 후부터 남편의 머리를 손질하는 일은 나의 몫이 되었다.


그의 얇아진 머리카락 사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맨살이 손끝에 닿았다. 36년의 시간을 말해주는, 그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순간 시큰한 콧등의 울컥임이 코끝을 타고 내려온다. 그 안에는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간들이 묻어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무의식 속에 머물러있던 파편화된 36년 동안의 조각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겨울비를 맞으며 갓난아기 첫째를 들쳐업고 이삿짐 옮기던 날, 한 칸 방에서 시어머니와 살던 생활, 출산 후 일주일 만에 직장 나갔던 일들. 서로를 다독이며 버텨온 36년의 시간들이 삶의 본질을 복원하여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여 우리 앞으로 되돌려 놓으면서 우리 부부는 시간 너머에 존재했다.


“오늘 내 솜씨 어때요?” 정해진 대답을 알지만, 매번 묻는 나의 물음이다.

남편이 거울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완벽해. 그리고 당신이 내 머리를 다듬어 주는 이 모습이야말로 명화지.”

나는 스펀지로 남편의 목덜미를 정리하며 미소 지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매 순간 서로를 조율하며 우리는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다.

나는 남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여보, 당신의 은회색 빛 왕관을 오래 간직하세요. 20년, 30년 후에도, 이 손으로 당신의 머리를 매만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