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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유럽의 응접실을 대한민국 대로변에서 마주치다

by 아트인사이트 Mar 23. 2025


그날은 유독 날이 화창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 늦겨울에서 초봄 사이였음에도 어째서인지 나는 더워했고, 무거운 검은색 가방을 들고 이리저리 길을 헤매고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수동'이라고 하면 젊음이 돌아다니는 번화가를 떠올리지만 그곳은 번화가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큰 대로변 옆으로 예쁘게 꾸며진 가게가 아닌 오래된 철물점과 음식점들이 즐비해있던 곳이었다.


구축 건물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던 내가 마침내 찾은 것은 붉은 벽돌 사이 검은색으로 칠해져있는 작은 가게 외부였다. 간판에는 서양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미니멀을 추구하는 요즘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필기체의 영문자들이 창문에서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붉은 벨벳 로프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살면서 내가 붉은 벨벳 로프를 언제 보았을까 떠올리면 한 손에 꼽았기에 더욱 예상치 못한 물건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기묘한 공간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이 함께 자리 잡아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그것들은 시대의 요구와 유행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프라이드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카페'라는 반가운 글씨를 읽으며 오픈 팻말이 걸린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나는 유럽을 마주했다.



02. 시공간을 건너, 오랜 유럽으로


가보지 못했던 이국의 풍요로움은 소년들의 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꿈만 같은 공간이라고 그곳을 표현한다면 과장은 아닐 것이다. 동화를 읽었던 어느 시절 나는 꿈속에서 촛대가 늘어진 왕궁 안을 누비었고, 성인이 된 나는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그곳을 마주했다.


카페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을 가득 메우고도 부족해 벽의 곳곳에 걸려있었던 오랜 그림이었다. 미술책에서 본 것만 같은 낡은 붓질들이 색 바랜 황금빛 액자에 담겨 카페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위로 드리운 따뜻한 조명의 온기였다. 바깥은 정오였으나 카페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해는 금지되어 있었다. 해의 역할은 붉고 노란 곳곳의 조명이 대신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이따금씩 호기심 어린 눈으로 커튼 틈을 통해 카페 안을 엿보았으나 카페를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문득 대학 수업에서 들었던 공간을 떠올렸다. 지금의 박물관 내지 미술관의 시초가 되는 공간은 과거 호기심의 방 또는 경이의 방이라고 불렸다. 그곳은 현대의 전시가 갖고 있는 여백의 미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수집품을 과시하기 위해 벽면부터 천장까지 꼼꼼하게 채운 공간이었고, 그렇게 방을 가득 채운 신비로움에 손님들은 눈길을 빼앗겼다고 한다.


이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현대에는 쉽게 보지 못하는 낡은 물건들과, 오랜 미술품들이 채도 낮은 붉은색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가구가 시간의 흐름이 가늠되지 않았다. 어떤 것은 색이 바래져 있었고 어떤 것은 깊고 얕은 상처가 겉면에 패어 있었다. 어떤 것은 나무 향이 났고 어떤 것은 나무 향조차 나지 않았다. 새로운 것들이 즐비한 요즘, 나는 시간의 흔적들이 갖고 있는 낯선 아름다움에 나는 눈길이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카페의 가장 깊은 곳에는 투명한 유리잔들이 즐비해 있었고, 그 안쪽에는 남성이 의자에 앉아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내부 곳곳에 위치한 둥근 테이블들을 뒤로하고 두 점의 큰 풍경화가 걸린 넓은 테이블에 무거웠던 가방을 내려놓은 뒤 그에게 다가갔다.



03. 그의 꿈


카페는 고요했다. 나는 카운터 앞에 서서 오랜 도서 위에 투박하게 손수 쓰인 메뉴판을 읽었다. 메뉴는 많지 않았고, 무엇을 마시는 것이 좋을지 짧게 고민하다가 평소 즐겨 마시는 밀크티를 주문했다.


밀크티를 이야기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 남성을 바라보았다. 바의 형태를 띠고 있는 카운터 뒤에서 가만히 서서 나의 주문을 기다리던 그는 어깨까지 오는 부드러운 웨이브 머리에 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색색의 조명 아래에서 커피 머신을 등지고 서있는 그는 카페만큼이나 묘한 존재였다. 국적으로 따진다면 한국인이었으나, 그의 인상에는 어딘가 이국적인 면이 섞여 있었다.


곧 그는 고급스러운 유리잔에 담긴 밀크티를 담은 뒤, 정성스레 접힌 티슈와 함께 은쟁반에 담아 내가 앉은 자리로 다가왔다. 넓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내가 마주 앉아 카페 사장과 문화부 기자로 서로에게 인사를 나눴을 때, 감사 인사와 함께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는 나를 보며 그는 말을 꺼냈다.


"저희는 르네상스 시대의 응접실을 꿈꿨어요."


내가 유리잔에서 입을 떼자 그는 추억에 젖은 눈으로 카페를 둘러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비록 한국에서는 그 의미가 조금 퇴색되었지만 원래 '살롱'이라는 단어는 손님을 초대하여 티를 나눠 마시는 응접실을 의미하잖아요. 저와 와이프는 '우리만의 살롱을 만들자'는 꿈을 갖고 카페를 꾸몄어요. 애초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우리 취향대로 꾸미고 그곳에 손님을 모시는 것이 목표였죠. 그래서 리모델링부터 인테리어까지 전부 저희의 손길이 거쳤어요. 카페에 있는 물건들 모두 우리가 일부러 오래된 물건을 찾아 구매한 것들이 아닌, 오래전부터 우리가 기존에 모았던 수집품들이에요. 이 카페는 우리 취향이 모이고 모인 결과물이에요."


그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나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물론 불안감도 있었어요. '응접실'이라는 방향성은 있었지만 '어떤 인테리어를 하고 싶다'는 목표는 없었거든요. 어떻게 이 공간이 완성될지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죠. 그래서 화장실을 보시면 카페 내부보다 더욱 독특하게 느껴지실 거예요. 하하. 하지만 와이프와 하나하나 공을 들여 꾸미니 이렇게, 나름 저희의 취향과 방향성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완성된 것 같아요."



04. 어째서, 카페


그는 한 여자만을 사랑한 로맨티시스트였다. 20대 초반 처음 와이프를 만나고 불같은 사랑을 이어오다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들은 서로의 영혼을 공식적으로 나눠가짐에 기뻐하며 유럽으로 떠났고, 여느 커플들이 그렇듯 다투게 되어 하루 정도 각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갑작스레 타국에서 혼자가 된 그는 베네치아 광장 옆의 카페 거리를 거닐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년 부부가 에스프레소를 즐기며 서로의 애정 어린 시선을 나누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그 순간을 이 카페에 담고 싶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벗어나 유럽이라는 곳의 낭만을 찾을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고, 타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를 그들과 나누고 싶었다.


"예쁜 카페는 대한민국에 너무 많으니까요. 저희는 단순히 예쁜 카페를 넘어서서, 유럽에서의 추억과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카페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렇기에 그의 귀에 카페에 들어온 손님들이 '내가 오스트리아에서 갔던 카페가 이런 분위기였어' 혹은 '내가 유럽 여행 갔을 때가 기억이 나' 추억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할 때면 그는 자신의 목표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는 마음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05. 밀크티의 품격


대화가 무르익을 때쯤, 카페에는 점차 휴식을 찾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떠나고 나는 다시금 밀크티를 즐겼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얼그레이 찻잎에 크림 향이 가미되어 있고, 사탕수수로 당도를 맞추어 평소 즐기는 밀크티와는 조금 맛이 다를 것이라고 했다.


'고급스럽다'


가장 처음 떠오른 것은 그 한 문장이었다. 목 넘김 이후 울대에 남아있는 얼그레이의 부드러우면서도 깊이 있는 잔향이 유독 인상 깊었다.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내쉬면 얼그레이 향이 코 끝을 스쳤다.


무엇보다도 '달지만 달지 않다'는 모순됨이 좋았다.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밀크티에 어우러져있던 단 맛은 어디까지나 얼그레이향을 보조하는 역할로 그 맡은 바를 충분히 수행했다. 단내가 무겁게 입안에 남아있지도 않았고, 싸구려 감미료 특유의 '먹자마자 살찌는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미식가가 되지 못한 나는 카페에 가면 오 분의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음료를 전부 마시는 사람이었다. 커피의 산미니, 향이니 아무리 이야기해도 나에게는 비슷하게 느껴졌다. 목을 축일 수 있으면 시원한 것이었고 단 맛이 나면 맛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밀크티는 일부러 오래 시간을 들여 그 향과 부드러운 달콤함을 즐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지금까지 마셨던 밀크티 중 가장 인상이 깊었다.


해의 기세가 꺾일 때쯤 나는 카페를 나섰다. 문밖으로 나오자 세상은 다시 나에게 친숙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어둡고 운치 있는 오랜 응접실에서 벗어나자 밝고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변이 나타나니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만 같은 기분에 여운이 남았다.


나는 아직도 그의 눈빛이 기억이 난다. 이 카페의 시작을 회상하던 그의 눈에 담겨 있던 애정과, 이 카페의 앞으로를 꿈꾸는 그의 눈에 박혀있던 반짝이던 보석들. 그는 브루크가 성장하여 대한민국의 지친 이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는 브랜드가 되기를 목표하고 있었다. 자신의 시간에 확신을 갖고 미래를 그리는 자의 표정은 무엇보다도 값지다.


성수역에서 큰 길로 걸어서 15분,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핫 플레이스'로부터는 아주 조금 거리가 있는 곳. 그러나 나는 다시금 굳게 닫힌 검은색 문을 바라보며 그럼에도 성수동에 오면 이 공간을 다시 들릴 수밖에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김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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