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명]
어떤 대상의 의의나 가치를 다시 들추어 살핌
익숙한 대상과 사건들이 다시 새롭게 보이는 중입니다
이 글은 당연함에 가려졌던 그 가치를 재조명한 작업입니다
‘코코’는 내가 아는 생명체 중에 현재 가장 미스터리한 존재다. 뭐랄까, 고양이에게 이런 표현이 적절한가 싶지만 코코는 속을 도통 모르겠다. 첫째나 막내와 달리 자기를 시원하게 드러내지 않을 뿐더러 혼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예측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있다. 원래도 무표정한 고양이한테 ‘너 좀 포커페이스 같다?’ 라고 하는 것이 웃기긴 한데, 코코는 정말로 포커페이스의 신이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블랙 수트 차림의 늠름한 사나이 같기도 하다. 가슴의 흰 털이 꼭 새하얀 셔츠 같고 검정 털은 자꾸만 여며 주고 싶은 턱시도 자켓처럼 보인다(참고로 코코는 코숏턱시도 여자 고양이다). 코코는 자기가 먼저 다가가기 전에 집사가 먼저 다가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용건이 없으면 쓸데없이 치대지 않는다고 하지만 같이 산 세월이 무색할 만큼 조금의 스킨십도 귀찮아하는 코코 때문에 은근히 서운할 때가 많았다.
아이러니한 건 철옹성처럼 굳게 닫힌 코코의 마음이 할머니 한정으로만 와르르 무너진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할머니 껌딱지인 코코는 최애 인간인 우리 엄마에게 안겨 손길을 허락하고 얄밉도록 간드러지게 알랑방귀를 뀐다. 정말 쉽지 않은 고양이다. 코코가 무방비 상태가 되는 순간, 이때다 싶어 망고스틴 같은 솜방망이도 한번 잡아 보고, 내 손을 뿌리칠 때마다 거참 비싸게 구네 툴툴거려도 보고, 계속 거절당해도 제발 나 좀 봐달라며 사랑을 구걸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일방향적으로 질척거렸던 내가 코코의 차애 인간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조금 얼떨떨하다. 요즘 우리는 밤마다 몰래 접선 중이다. 비공식적으로 말이다. 시작은 이러했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뉘앙스로 가볍게 툭 던진 말이었다.
“코코, 밤에 언니 방에 놀러 와.”
그 말을 던져 놓고 잊고 있었다. 밤 12시였나 새벽 1시였나 방에서 갑자기 “벅벅벅” 소리가 났다. 소리가 몇 번 나다가 안 나길래 혹시나 싶어 방문을 열었더니 코코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 왔어” 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일이 몇 번 더 이어졌고 그때마다 코코는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쳤다. 시간대는 매번 달랐지만 약속한 것처럼 정말 밤마다 내 방에 찾아왔다.
나도 더 이상 빈말은 할 수가 없었다. 코코는 누구보다 이 약속에 진심이었다. 철썩같이 약속을 지키러 온 생명체 앞에서 뻥쟁이가 되기는 싫다. 온 감각을 동원하여 집사의 언어를 꾹꾹 새겨듣고 그 뉘앙스를 열심히 해석하는 것 같은 코코의 집중하는 표정을 본 뒤로는 녀석을 특별한 밤 손님으로 맞기로 했다. 귀한 손님이 되니 알아가는 재미가 부쩍 늘었다. ‘눈에다 별을 박았나 쳐다보는 눈빛이 왜 이렇게 촉촉하지’ ‘이름도 뭔가 밤이랑 잘 어울리네’ 하고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중이다.
우리의 약속은 길면 한두 시간에서 짧으면 30분이 채 안 걸린다. 같이 놀거나 같이 아무 것도 안 한다. 코코는 랜덤 모드로 방에 입장하는데 1. 똥강아지가 되거나 2. 돌멩이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똥강아지 모드일 때는 그간 밀린 애교를 방출이라도 하듯 온몸을 던져 사랑을 표현한다. 발라당 배를 보여주며 뒹굴거리거나,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계속 나를 느끼하게 쳐다보거나, 자기 얼굴을 내 뺨에 마구 부비기도 한다. 그럼 나는 꼼짝도 못하고 기분 좋게 무너져 내린다.
돌멩이 모드일 때 코코는 눈만 말똥말똥하게 뜨고 가만히 있는다. 딱히 무언가를 하지는 않는다.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나를 조용히 쳐다보기만 하거나 내가 앉는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쉬다 간다. 그러다 졸음이 몰려오면 편한 자리를 물색하다 식빵 자세를 취하고 꾸벅 졸기도 한다. 볼일이 끝난 코코는 방문 앞에 조용히 앉는 것으로 이제 그만 가보겠다는 사인을 보낸다. 문을 열어 배웅해 주면 밤 약속은 그렇게 끝이 난다.
심심한 밤을 재밌게 바꿔준 코코 덕분에 엉뚱한 생각도 든다. 귀여움을 무기로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는 고양이는 어쩌면 범우주적 차원의 대의를 위한, 우주에서 떨어뜨린 스파이일 수도 있겠다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해 본다. 한밤중에 만나는 턱시도 차림의 생명체가 가끔씩 믿어지지 않아서 그런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괜히 애틋해진다. 겨우 방문 하나의 넘나듦인데 우리의 만남은 어딘가 은밀한 구석이 있다. 매일같이 보면서도 이 공간 안에서 보면 뭔가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샘솟는다. 3미터 제곱의 정사각형 작은 방안에서 인간 하나와 고양이 하나가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 그 순간 둘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되어 준다.
수줍지만 터프하게 미뤄 둔 마음을 전하는 코코를 보며 방문 하나를 넘을 수 있는 작은 용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먼저 다가가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지는 일들이 있다. 그러지 않았을 때의 방문 하나란 세상 넘기 어려운 벽과 같으니까.
아무쪼록 코코가 계속 밤에 놀러오게끔 잘해줘야겠다. 아직도 잘 모르겠는 미스터리한 대상이 있다는 것은 잘된 일이다. 코코도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 곧 있으면 새 밤이 열린다. 벅벅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