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 오면, 소풍을 갔다. 그때마다 우리는 관례적인 응답을 주고받았다. 이번에는 뭐 싸줄까. 김밥. 김밥이 좋았다. 때로는 유부초밥이나 베어컨말이가 대신하였지만, 우선순위는 한결같았다. 별다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주는 상징에 기댔다. 가장 무난하고 평범한, 그냥 김밥.
당신은 그냥이 아니었다. 냉장고에 나뒹구는 재료는 일절 없다시피 했고, 전날 장을 봐 일일이 손질한 것이었다. 재료의 가짓수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김밥이 적합했다. 어린 날에 애정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어떤 물질로는 말이다. 얼핏 보아도 준비하는 데는 수고가 요해 보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당신의 품보다 나의 폼이 더 중요할 때였다.
그날은 새벽부터 분주해진다. 엄밀히는 당신만 그렇다. 제 책임을 떠맡긴 채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쿨쿨 잔다. 설레서 전날 잠을 설치지 않았을까, 굳이 변명해 본다. 꿈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눈이 떠진다. 평소 같으면 쉽사리 눈꺼풀을 올리지 못했을 텐데, 유난히 가볍다. 그 힘으로 방문을 열고, 입이 열린다.
아침 인사와 동시에 김밥을 하나 주워 먹는다. 그때 당신은 득달같이 말린다. 꼭 물을 먼저 마시라고 말한다. 성급한 탓에 입에는 물과 김밥이 우겨졌다. 곧이어 식도에는 물과 김밥이 뒤섞여 흐른다. 눈곱도 하나 껴있을지 모르겠다.
김밥은 항상 세 곳으로 준비된다. 가장 예쁜 것은 도시락통에, 다음 것은 내 입속에, 그다음 것은 그냥 반찬통에. 종류도 세 가지이다. 그냥 김밥. 참치김밥. 누드김밥. 첫째는 맛있고, 둘째는 탁월했으며, 셋째는 남달랐다.
도시락은 나의 평소 할당량보다 더 푸짐했다. 당신은 내가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나눠 먹을 것을 예견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런 성격이 못 되었다. 친구들에게 쉽사리 음식을 건네지 못했다. 반대로 나는 친구들이 싸 온 도시락을 한 젓가락씩 뺏어 먹곤 했다. 두 번은 손이 가지 않았다. 나의 입맛엔 당신이 정확했다. 먹어본 것 중 가장 산듯했다.
나누지 못한 음식은 남기 십상이었고, 매번 그것을 처리하기란 고역이었다. 남은 음식을 그대로 들고 가면 당신이 상처받거나 괜스레 걱정할 것을 알았기에,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는 악행을 일삼곤 했다. 간혹 집 앞 벤치에 앉아 쉰내 나는 김밥을 우걱우걱 넣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 못 할 노릇은 무용해졌다. 중학교로 진학하고서부터 도시락을 싸는 일이 사라졌다. 가성비 도시락이 수제 도시락을 대신하였다. 알람 소리에 일찍 깨,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였다. 가게에 들러, 치킨이나 참치가 마요네즈와 어우러진 종이 도시락을 포장했다. 여느 때는 다른 친구 것을 대신 사다 주기도 했다. 하나만 더 주문하면 됐다.
소풍 전날 우리의 대화는 일축됐다. 새로이 만들어진 관례적인 대사를 건넸다. 도시락을 안 싸도 된다고, 나는 질문 없는 대답을 선수 쳤다. 이 한마디에 당신의 수고는 줄었다. 나는 당신의 품을 지켜주었다고 착각하며 또다시 나의 품을 중시했다. 당신은 처음 한두 번은 그러려니 하는 듯해 보이다, 점차 지속되자 우리는 어느새 김밥을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집밥 먹듯 도시락을 먹고, 소풍 음식 먹듯 집밥을 먹는다. 재료만 몇 만 원이 훌쩍 넘는 수제 도시락을 이삼천 원짜리 포장 도시락과 견준다는 사고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질리도록 도시락을 먹고서야 후회가 밀려오나 어쩌겠는가. 당신의 낙을 갉아먹은 만큼, 나는 맛을 가려먹을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지금 아이들이 소풍을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간다고 한들 도시락을 싸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큰 관심이 없다. 이러쿵저러쿵 설명해도 알아먹지 못할 것이다. 소풍을 떠올릴 때마다 음식이 동행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까. 소풍은 당신의 목소리와 물길이 지나간 자리에 욱여넣은 텁텁함으로 사무친다는 사실을. 그러나 버렸던 음식은 다시금 주워 먹을 수는 없고, 쓰레기통을 뒤져도 흔적은 남아있지 않는다. 그 진실을 기어코 인정해야 할 때, 비로소 소풍은 가고, 봄날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