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가지는 것에 대한 죄책감,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한 공포감, 와중에 자주 남들과는 다름을 증명해야 할 때 오는 자괴감 : 한국의 청년들이 무릇 겪는 감정들이다. ‘열심히’를 금과옥조로 무한정 달려가는 우리들은 어떤 여름을 지나왔을까.
내 친구들을 말려 죽이는 ‘스펙’이라는 단어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어원은 영어의 ‘specification’으로 사물이나 제품의 사양, 규격, 설명서 등을 뜻한다. 인간에 대입해서 역량이나 능력, 경력 등을 일컫는 말로 ‘스펙’을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라고 한다. 사실 능력주의 시스템 아래 기업 혹은 채용기관이 예비 근로자의 능력을 평가할 정량적인 기준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스펙을 쌓기 위한 활동이 실제로 그 사람을 채용기관이 요구하는 인재상으로 성장시켰다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다. 좋은 경험을 쌓은 지원자도, 필요로 했던 직원을 채용한 기업도.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스펙’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날까. 특별히 열과 성을 다해 스펙 쌓기에 매진한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근원적인 것을 묻자면 당연히 문제는 사회에 있다. 한국 학생들이 교육과정 동안 쭉 그래왔듯, 시험 점수든 생활기록부의 글자 수든 가장 많이 쌓아 올린 사람부터 ‘성공’하는 체제가 취업시장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자소서에 훌륭하게 쓰일 한 단락을 위해, 즉 ‘경험했다는 사실’을 얻기 위해 경험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관점의 이야기보다는 우리가 의도치 않게 겪어야 했던 얄궂은 감정들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이 글은 ‘스펙’이라는 단어 자체를 엄청나게 미워하는 글이다.
1.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데
‘경험’이란 듣기 좋다. 사실 좋고 나쁘다 할 것 없는 자연스러움이다. 경험을 통한 배움, 그것을 통한 성장은 곧 인류의 근간으로서 아름답다. 그러나 ‘스펙’이라는 단어는 경험을 통한 성장을 단숨에 경제적 성장으로만 한정 짓는다. 스펙이라고 불리는 순간 모든 일은 취업의 문턱을 넘기 위한 것이지 무언가를 좋아해서라든가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었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다. 과정에서 있었던 진심은 싹 거두어졌다가, 자소서를 쓸 때만 예쁜 미사여구를 입고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스펙을 많이 쌓은 친구가 부럽고, 같은 시간을 현명하게 쓰지 못한 내가 원망스럽고 또 초조하다. ‘누군가 어디에 합격했다더라’ 하는 말, ‘첫 출근’이라는 캡션과 함께 SNS에 업로드된 회사 사진, 이런 것들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순간이 쌓인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발견되는 것에 대해 나는 혼자서 마구 화를 낸다. “왜 이래야 하는데? 사랑하는 친구가 새로운 일을 찾게 된 걸 호기심과 응원만으로 대할 수는 없는 거야?” 그렇게 이중 삼중으로 억울함이 중첩된다. 열등감, 열등감을 느낌을 인지,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사실까지 인지하면서.
여기서 제안하고 싶은 건, “그래도 난 이 정도는 해놨으니까 괜찮아”라는 식의 위로를 하기보다는 한 방향만 보고 있던 머리를 아예 뒤로 젖혀보자는 거다. 나에게 가장 행복과 가까운 얼굴은 무엇인지, 또 불행에 가까운 이름은 무엇인지부터 시작해 봐야 할 때다. 여름밤 해안을 산책하던 얼굴이었을까? 나의 노력이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음을 발견한 때였을까? 그럼, 불행의 이름은 무엇인가? 스펙 따위의 단어는 사장되어야 한다고 꼬깃꼬깃 접어서 버린다.
2. 이상주의자
태도를 바꾸면 세상의 부조리쯤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는 소리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청년 실업은 경제, 교육, 복지 등 큰 규모의 문제들이 맞물려 개인을 쥐어짜고 있는 형세가 된 것이지 단순히 개인의 질투심이 불행의 원인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스펙에 대한 평가는 채용 방식을 공정화하는 데 있어서 오랜 기간을 거쳐 얻어낸 지혜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스펙이란 단어를 다짜고짜 미워하는 건 조금 우스운 일이다. 앞서 말했던 청년으로서 느끼는 죄책감, 불안함, 공포감, 자괴감을 해소할 대상이 사회적인 현상을 상징하는 단어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꿈을 물었을 때 직업으로 대답하지 않기를, 요즘 하는 일을 물었을 때 신분으로 대답하지 않기를 원한다. 각자의 행복이 짓는 얼굴을 자세히 묘사하는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확실히 이상주의자다. 너무 이상만을 추구하다가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이 아닐지 걱정했던 때도 있다. 하지만 이상이 있을 때의 불행은 그렇지 않을 때보다 오히려 건강한 것 아닐까. 어차피 목적지에 닿을 수 없는 항해라면, 끝없는 노질보다는 별을 자주 바라보는 게 나는 더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