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H의 일기

그러나 취업에 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by 아트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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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털어놓기 어렵다. 보잘것없는 단상을 글로 써도 되는 걸까? 대단히 이뤄낸 것이야 물론 없고, 마음 먹은 일조차도 시도하지 않고 속에 품고 있을 뿐인데. 생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애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바라는 바는 많은데 항상 말뿐인 사람이다. 오기가 뻗쳐서 올해에는 기필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싶었는데,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간다. 얻은 것 없이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그러나 이제는 절망도 지겹다. 지난 몇 년간 넌더리가 날 정도로 수없이 절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주 잠시 낙담한 뒤 그만둔다. 집중력을 발휘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리고, 그것을 당장 사 먹고, 예쁘고 조용하고 테이블 높이가 적당히 높은 카페에 간다. 요즘엔 덥지도 않고 날도 좋으니까.


한없이 사소해져 볼까. 저기 눈을 반쯤 감고 나무바닥에 엎어져 있는 백구처럼.


성북천변에 위치한 카페에서 드뷔시를 들으며 커피를 마신다. 클래식은 잘 모르지만 드뷔시는 듣는 순간 단번에 좋은 곡들이 많다.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사람 목소리도 듣기 싫어질 때면 드뷔시 플레이리스트를 감상한다. 대표곡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전부 좋지만 내 취향에 가장 맞는 곡을 꼽자면 ‘목신의 오후 전주곡’과 ‘어린이 차지’다. 속이 시끄럽거나 분명한 아름다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드뷔시를 추천한다.


커피도 잘 모르지만 맛있다. 그래도 올해 카페 알바를 한 덕분에 조금은 더 맛을 느끼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다음에 친구를 데려와서 또 마셔봐야겠다.


노트북 화면을 보다가 왼쪽을 보면 나른해 보이기도, 사실 따분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로 주인이 할 일을 마치길 기다리는 백구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직 여전히 풍성한 거리의 녹음이 보인다. 카페 내부에도 식물이 한가득이다. 눈에도 이로운 초록은 역시 많을수록 좋다. 동네가 생명력으로 가득 찬 것 같고, 홀로 거리를 걸어도 어쩐지 혼자가 아닌 것 같고. 몇 달 뒤 맨숭해질 나무와 도시 풍경을 상상하면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든다. 열린 문으로 불어오는 개운한 바람이 참 좋고 야속하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속으로 침잠하기 어렵다. 오늘도 끝내 좌절로 결론이 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럴 때는 아기들의 애착인형마냥 뭐라도 껴안아야 한다. 이를테면 좋아하는 작가의 산문. 산문과 합체되어 무거워진 자아는 더 쉽게 속으로 내려갈 수 있을지 몰라.


친구들을 따라 지난봄부터 뉴스레터를 하나 구독하기 시작했다. 줄여서 우시사라고 불리는 ‘우리는 시를 사랑해’. 문학동네에서 연재하는 메일링 서비스로 시와 함께 필진들의 편지를 보내준다. 내가 이 뉴스레터를 성실하게 읽기 시작한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확인한 메일의 발신인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부터였다. 그가 이주영 배우와 함께 올여름 우시사의 필진으로 참여한 것이다. 뜻밖의 공간에서 마주친 그의 이름과 메일은 큰 즐거움이었다.


그가 보낸 우시사 메일을 다시 읽어본다. 그는 섬세하고 훌륭한 안목을 가진 사람, 요원한 바람이지만 닮고 싶은 사람이다. 지금껏 내가 읽어본 저서와 달리 누군가에게 나직이 말하듯 쓴 문장, 그래서 한층 다정함이 묻어나고 친밀감이 느껴지는 문장을 읽는다. 마음이 뜨끈하게 녹는다. 특별히 애틋한 문장들은 복사해 둔다.


애도는 대상을 상실한 이후가 아니라 곁에 있을 때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미 당신을 애도합니다.’

상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사랑의 시간을 백 퍼센트로 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애도는 사랑의 시작이거나 절정일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글에 써먹을 표현들도 쏙쏙 골라 메모해둔다. 이 분은 챗GPT를 돌리지 않고도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거겠지, 부러워하며.


하지만 오늘은 그른 것 같다. 여전히 마음은 내려갈 생각을 안하고 부표처럼 동동 떠있다. 고용 불안 때문이리라. 취준생에게 클래식과 커피와 산문과 함께 즐기는 오후는 아무래도 사치겠지.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치 부리지 않고 살 수 있나? 더 철저히 체제에 순응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다듬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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