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L빵집에서 일하던 20대 근로자가 지난 7월 과로사로 숨졌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조사에 따르면 사망 직전 일주일 동안 그의 노동시간은 주 80시간에 달했다. L빵집에서는 지난해 기준, SPC삼립에서 신청된 산재보다 2배 넘게 많은 산재가 발생했다는 보도도 잇따른다.
L빵집은 평소 미적인 분위기와 잘 다듬어진 디자인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며 ‘핫플’이 되었고, 소위 ‘감각적’이라는 형용사가 곧잘 붙었다.
여기서 ‘감각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전적 의미로는 “감각을 자극하는 것. 혹은 감각이나 자극에 예민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 사회에서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는 듯하다. 일례로 패션 업계에서 자주 사용하는 “감각적 코디”라 함은, 조금 분위기가 있고 세련된 스타일링을 일컫는 듯하다. 이 외에도 감각적 피드, 감각적 이미지, 감각적 디자인, 감각적 인테리어 등 수많은 감각적인 무언가가 미적으로 숭배되는 추세이다.
L빵집 역시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유행의 주요인이었다. 런던의 한 베이글 가게에서 영감을 받은 만큼 전반적으로 이국적인 매장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것들이 모두 가짜 감각으로 느껴진다. 텅 비어 있다. 감각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오묘한 하입(hype)함만이 떠돈다. 감각이란, 자연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감각이라는 건 바깥의 자극과 연결되는 것이고 그건 곧 생명력과 공명한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 녹아든다는 것.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옆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때론 남과 공존하는 일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 그리고 감각적이기에 잘 느껴지는 그 불편을 남에겐 덜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감각적인 삶이다.
요즘의 감각적 무언가에는 이런 자연이 모조리 생략되는 것 같다. 잘 정돈된 미를 감상하며 아름다움 외에는 모두 배제해도 된다는 우월함만이 남아있다. 감각적 코디를 입은 누군가는 감각적 인테리어를 한 노키즈 존 카페에 간 후 감각적 피드를 업로드한다. 감각적 미장센에 능한 어느 감독은 그 위에 혐오의 서사를 겹쳐 올린다. 한강과 노을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던 노들섬의 풍경은, 어느 외국 건축가의 감각적 조감도에 따라 아름답지만 인위적인 모습으로 바뀔 예정이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이런 감각에는 나만 있고 네가 없다. 상처도 온기도 없다. 그런 것엔 미래도 없다. 보기 좋게 매끈매끈 다듬어진 허연 아름다움만이 있다. 아름다움은 무작정 숭배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닌데. 아름다움 위에 아무것도 없다면, 아름다움이 올려다볼 것이 없다면, 그런 아름다움은 어디를 바라볼 수 있는가. 누구에게 말을 걸 수 있는가. 그런 아름다움에는 눈도 입도 없다. 세상에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한다.
L빵집의 감각적 인테리어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사회를 살아가는 한 노동자로서 화가 나는 건 당연하다. 감각적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매장 노동자의 피땀이 필요했을까. 감각적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속은 얼마나 썩어 있었을까. 그리고 묻고 싶다. 그놈의 감각적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L빵집은 숨진 근로자의 노동시간이 평소 대비 높은 수준이었음을 인정했지만, 과로사 여부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L빵집의 매장은 여전히 감각적이다. 감각적 차림을 한 사람들이 여전히 드나든다. 동시에 그 앞에서 시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 글씨로 가득한 피켓이 L빵집의 감각적 전경을 해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