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 어떤지는 더 살아보고 말해볼게요
청춘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10대 후반에서 20대에 걸친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
사전에 청춘을 검색하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사전에 따르면 나는 청춘을 보내고 있다.
내가 청춘을 살기 전부터 청춘은 내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우리들을 보고 선생님은 좋을 때라며 미소지었고, 재수 학원 선생님은 20대가 인생의 다시 오지 않는 황금기임을 강조했으며, 엄마는 스물다섯 살에서 스물일곱 살까지가 여자 얼굴이 가장 예쁠 때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청춘은 그렇게 이미 그 시기를 지난 사람들의 말과 글로 과장되고 포장되어 내 앞에 배달되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청춘이 막상 눈 앞에 다가오자 낯을 가리듯 주변을 멤돌기만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림자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 그림자 놀이는 어릴적 하던 것처럼 손으로 여러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내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주었던 '청춘'이라는 것의 그림자에, 실제로 청춘을 살고 있는 내 그림자를 대 보았다.
늘 내 그림자는 일치하는 법이 없이 조금씩 엇나갔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청춘이라는 단어는 어색하고 불편했다. 사람들은 내가 청춘이라는데, 나는 좀처럼 그게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눈만 너무 부셔서 눈물이 났다.
난 그렇게 열정적이지도 않고, 미친 듯이 좋아하는 것도 없고, 치열하지도 않고, 갑자기 배낭 하나 매고 훌쩍 떠나는 일도 없고, 술은 쓰기만 했으며, 사랑에 밤새 눈물 흘리지도 않았다. 청춘이라 불리던 내 시간은 망설이고 고민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집에 있는 게 가장 좋았고, 모르는 사람을 만나야 할 때면 심하면 며칠 전부터 긴장을 했다. 누군가 나더러 가장 좋은 때를 살고 있다고 하면 도리어 불안해졌다.
지금 꼭 해야 하는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가운데서도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흘렀다. 영 상상이 되지 않던 나이들도 이제 과거가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엄마 표현에 따르면 가장 얼굴이 예쁘다는 시기가 되었다.
감흥 없이 거울 속 나와 마주하던 어느 날, 나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림자 놀이를 멈췄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1차적으로는 그저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사람들이 지금 그 나이에 꼭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들을 하지 않고 지나가도 두려워하던 것만큼 무슨 큰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나 자신이 20대 초반보다는 지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조심스레 생각한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사람들이 입 모아 20대 때 해봐야 한다고 말했던 것들을 꾸역꾸역 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나만의 좁은 세계에서 한발짝씩 걸어나와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간 것은 대부분 좋아하는 것들에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행동할 때였다. 두려워도 하고 싶은 일들을 놓치기 싫어 눈 딱 감고 시도할 때였고, 좋아하는 것들 앞에서 부끄럽고 싶지 않다고 마음 먹었을 때였다. 그 과정에서 내 좁은 세상에는 없던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은 조금씩 늘어났다. 이제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다.
물론 불안한 날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도 나이가 더 들면 못 한다는 말에 휩쓸려 내가 정말로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나고 생각해 봐도 그런 일들을 안 한 게 후회되지 않는다. 정작 후회되는 건 따로 있다.
재작년 이맘때는 학교 동아리 홍보 기간으로, 온갖 동아리들이 바깥에 부스를 차리고 신입생들을 맞고 있었다. 나도 내가 속한 동아리 홍보를 위해 앉아 있었는데, 맞은편의 밴드 동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 부원 중 한 사람이 The Cranberries의 'Zombie'를 크게 틀고 거기에 맞춰 기타 연주를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곡이라서 멍하니 듣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디션에서 떨어지거나 중간에 나오게 되었어도 새내기 때 학교 밴드에 한 번 들어가 봤다면 어땠을까 하고. 가끔 후회하는 것들은 그런 거다. 날 설레게 하는 것에 한 걸음 더 다가가지 못한 것. 그 설렘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것.
무엇을 후회하게 될지 알기에, 이제 나는 그림자 놀이를 하는 대신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에 더 귀를 기울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열심히 좋아하려 노력한다. 매주 돌아오는 주말, 좋아하는 뮤지션의 새 공연, 스포일러를 밟지 않고 궁금해하며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는 것, 좋아하는 게임의 신작 출시 소식, 혼란한 가운데서도 하루가 다르게 성큼 다가오는 봄,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그 글을 누군가가 읽는다는 것. 설레는 것들은 작게는 일상 여기 저기에, 크게는 인생 전체에 걸쳐 듬성듬성 포진해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설레는 일이 줄어든다고 한다. 경험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비가 내리는 일이 인생에 몇 번 경험 못 한 신비로운 현상이지만, 어른에게는 수백 번도 더 본 풍경이라 우산을 들고 나가야 하는 게 귀찮을 뿐이다. 나 역시 최근 들어 새로운 무언가를 접해도 예전만큼 깊게 빠져들지 않고 금방 마음이 사그라들 때,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럴 때면 물리적인 나이와 세월 앞에서 설렘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 의문에 답하자면, 아직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청춘의 사전적 정의는 앞서 말한 것과 같지만, 지난 2015년 UN은 15세부터 65세까지를 청년으로 분류하는 새로운 연령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그 기준에 따르면 내가 청년으로 살아갈 나이는 아직 많이 남았다. 지금으로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삶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 아주 많으니까. 다만, 내게는 그 날들도 청춘이다. 그리고 그 청춘을 사는 동안에는 이게 맞다며 속삭이는 여러 그림자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다가올 그 수많은 날들을 나만의 그림자로 살아낸 다음, 청춘이 어땠는지 다시 말하고 싶다.
글/사진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김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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