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전에는 이 모든걸 할 수있을까?선택장애....망설이고 머뭇거리고 불안해하던 시간들이 뜸들여지는 과정이었는지 인생은 나를 믿고 가는것이다!
나의 선택을 믿고 칭찬하고 스스로를 격려하라는 선배님들의 지혜로운 조언들이 트라우마 후유증과 불안과 싸우는 나를 탄탄한 무대로 업그레이드 시켜가는 듯했다.
요지는 이렇다.
결과가 어떻든 보람있고 뿌듯한 순간! 내자신이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그럴싸한 감동을 주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
미술관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그때 대답할 수있어서 기뻤다. 준비된 메뉴얼이 아닌 뻔하지않은 신념같은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물질만능 계급사회. 빈부의 격차가 심한데 미술은 부유층의 산물이라는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지자체 미술관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해운대 반짝이는 파도빛 속에 움직이는 해녀들의 모습처럼 서민들의 생존욕구와 의식주 생계를 생각하며 보리고개부터 살아내온 아버지 시절! 미술은 밥그릇과 동떨어진 사치같은 것으로 인식되어졌었다.
그런데 고령화되면서 죽기전에 공부가하고 싶어 소학교 출신 학구열에 불타 78세에 대학 평생교육원에 들어간 아버지의 심정은 우리나라 피난민 국제시장 스토리나 어려웠던 시절의 어르신들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생을 마감하기전에 교육기관으로서의 미술관은 그런분들에게 마지막 감동이나 잊지못할 추억으로 손을 내밀어 아웃리치 서비스를 진행해야 되지않을까? 갤러리가 할 수없는 일. 사설 뮤지엄이 해낼 수 없는 일. 서민들의 안식을 줄 수있는 복지. 그거 지자체에서 해야하지 않을까. ...
그런 답변을하고 내스스로가서민출신 흑수저 출신으로 고급진 미술계에 살아남고있는 자체에 뿌듯했다. 그럴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다. 현실이 받쳐줄까는 모르겠다만.
정신은 혼미했지만 보람있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즐겁게 살기로 했다. 뜨거운 태양을 등지고 마냥 행복해하기로 했다.부산도 대구도 태양이 뜨거웠다. 참 마음에 든다. 사람도 상황도 쿨하기 보다 뜨겁고 단단한 상태가 늘 안심이다.
생명의 정원! 2002년 부산 비엔날레 시작 월드컵4강진출때 나는제2회 학예사 시험을 밑도 끝도없이 보러갔고 2003년 서민들에게도 문화의 힘과 행복할 권리를 나눠주는 사람이되자는 마음으로 일류를 향해 큐레이터의 길을 나아갔다.
이곳에서 나는 10년뒤 20년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염원하며 살면서 그것을 서원 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되로되지않아 의아해하던 시간도 이제는 모두 감사해가기로 했다
고급미술과 대중미술 사이
가끔은 날것의 대중미술이 맘을 편안하게 한다.
사치 허영 아니라 숨쉴 수 없어서 그리는 그림.
숨쉬듯 한숨 뿜 으며 쏟아내듯 나오는 글. 그런 예술은 생존예술 일까 아닐까? 살기위해 나오는 예술적인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