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흘러가듯이
나는 맹물이다. 그냥 물이다. 바보 같다고 생각될 때도 많다. 시끄러운 하이톤을 낮춰 완전한 물이 되고 싶다. 오늘은 물방울을 형상한 오태원 작가를 만났다. 이 작품이 가지는 메시지는 어디서든 적용된다. 일단 잠시 물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나는 적어보련다.
물 같은 성격 :
"물 같은 사람이 좋다. 흐르되 부딪히면 맑아지고, 가라앉되 탁하지 않은 사람. 세상엔 말이 많지만, 물은 말하지 않는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는다. 물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낮춤이 곧 높음이 되는 법을 안다. 겸허하면서도 단단한 것, 그게 물의 방식이다. 고요한 물일수록 깊다. 시끄럽지 않아도 울림이 있다. 그게 진짜 사람의 깊이다. 막히면 돌아간다. 물은 포기하지 않는다. 물은 감정을 기억한다. 따뜻한 손길에 맑아지고, 차가운 마음에 얼어붙는다. 흐르듯 살아라. 멈추지 말고, 형태를 고집하지 말라. 물이 깊으면 소리가 없다. 깊은 사람일수록 조용하다. 그 고요함이 세상을 살린다. 그래서 나는 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때로는 비로 떨어지고, 때로는 안개로 흩어지고, 때로는 강으로 모여드는 그런 사람. 물이 흘러간 자리에는 풀잎이 자라고, 생명이 깃든다.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적시는 사람. 나는 물 같은 사람이 좋다.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고, 흐르면서도 머문다. 어느 날은 눈물이 되고, 어느 날은 반짝임이 된다."
물방울의 정체성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오작가님의 드롭스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반짝반짝 어디서든 빛이 나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 있다. 물방울의 언어로 세계를 말하는 그녀의 물방울~ 오태원의 드롭스는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다. 그건 ‘존재의 시간’을 붙잡은 매개체다. 떨어지기 전의 순간, 부딪히는 찰나, 사라지는 여운까지 그 모든 시공간이 한 점의 물방울에 응축되어 있다.
오태원의 드롭스는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다. 떨어지기 전의 긴장, 부딪히는 순간의 섬광, 사라진 뒤의 잔향까지, 그 모든 시간의 결을 한 점의 구체 안에 담아낸다. 작가는 물을 멈추지 않고, 흐름 자체를 예술의 언어로 바꾼다. 크롬빛으로 빛나는 표면, 그 안에 비친 왜곡된 나의 얼굴, 그리고 빛의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 물방울은 형상보다 마음에 가까워진다.
드롭스는 장르의 이름을 거부한다. 회화이면서 조형이고, 설치이면서 영상이며, 기술이면서 감정이다. 물리적 언어와 디지털의 감각, 자연의 움직임과 테크놀로지의 계산이 한 공간 안에서 서로의 경계를 녹인다. 나는 그 상태를 ‘융복합의 미학’이라 부른다. 자연과 기술, 감성과 물성이 뒤섞여 새로운 생명을 얻는 순간. 물은 그때,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감정의 매개체가 된다.
그녀의 물방울 안에는 우주가 있다. 공기, 온도, 빛, 그림자가 미세하게 겹쳐지고, 그 층들 속에서 시간이 살아 움직인다. 멈춰 있는 듯하지만, 그 안은 끊임없이 흐른다. 나는 그 투명한 표면을 바라보며 ‘멈춤 속의 생명’을 본다. 물은 흐르며 기억하고, 투명함 속에서 세상을 품는다.
드롭스는 결국 물의 철학을 예술로 번역한 시도다. 자연에서 태어나 기술로 확장되고, 감정과 과학이 한 점의 빛으로 연결된다. 물은 형태가 없지만 모든 것을 비추고, 기술은 차가워 보이지만 감정을 품는다. 그 둘의 만남이 예술의 새로운 언어가 된다. 그녀의 물방울은 기억처럼, 감정처럼, 우리 안에서 반짝이며 흘러간다.
나는 오태원의 드롭스를 보며 깨닫는다. 융복합이란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가 투명하게 스며드는 일이라는 것을. 예술이 물처럼 흐를 때, 그건 더 이상 시각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의 언어가 된다. 그리고 그 물은 결국, 나를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