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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지협 Jan 03. 2024

콧줄로 밥을 먹는다는 것은

 뇌출혈로 인해 뇌경색까지 이어져 왼쪽 팔다리로 편마비가 온 나의 할머니. 할머니는 근처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었으나 2~3번의 튕김을 당하고, 발견 이후 이동시간과 체류시간상 2~3시간이 지난 이후에나 겨우 집으로부터 거리가 약 1시간 반정도의 거리에 있는 의료원 응급실에서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됐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할머니가 빠르게 집 근처 백병원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더라면, 지금의 상태까진 오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하곤 한다. 


 조금씩 미뤘던 할머니의 간병이야기. 그리고 현재 상황, 환자 가족으로써의 감정을 적게 되지만 그래도 할머니와의 소소했지만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으로 잊지 않고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비록 현재 마음 상태가 평온하진 못해서 슬픔 한 스푼, 후회 한 스푼씩 첨가되기도 할 테지만... 


 세상에는 나와 같은 유형의 마음 아픈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글을 통해 읽고서 현재, 지금 옆에 있는 이들의 소중함을 마음껏 느끼며 귀하게 대하시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셨음 하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뇌출혈로 인해 당장 수술이 시급하다는 판정을 받고서 뇌수술을 받은 할머니는 이후 만날 수 없었다. 단지 할머니가 위중한 상태라는 사실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머니와 아침 8시 20분, 저녁 8시 10분마다 관례처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보던 통화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조용한 일상이 대체되었다. 한동안 그게 어찌나 낯설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산 사람은 어쨌든 살아진다는 의미가 이런 맥락이지 않을까 싶었던데서 느낀 게... 늦잠을 자고 저녁에 티비를 보며 밥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약 2~3주간 중환자실에서 무의식 무인지 상태였다가 다행히도 중환자실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을 무렵 할머니가 인지는 없어도 의식은 차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컸다. 할머니 곁에서 간병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무작정 할머니 곁에서 간병을 하겠다는 통보를 했었다. 


 가족들이 모두 걱정했다.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 입장이지만 돈이 많이 들긴 해도 간병인을 쓰는 게 좋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누가 봐도 내가 간병을 해낼만한 체력으로는 가당치 않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기에 그런 심정을 가진다는 건 100% 이해했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꼭,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할머니에게 내가 필요했다. 신랑과 상의를 한 후 내게 총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처음에 방문했을 땐 2~3일 정도 할머니 곁을 지키게 됐었는데,  할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기게 되던 날이었다. 에어매트를 사야 한다는 이야기를 간호사로부터 듣고서 매점 가서 구입 후 에어를 넣던 중에 고장난 걸 한참 지난 후에 알게 돼서 다시 구입해서 다시 공기주입 중이었다. 


 점심시간이 다 된 11시 40분 무렵 웬 이동침대와 5명 정도의 남녀 간호사분들이 오더니, 할머니가 머무시기로 한 침상 위로 옮기는 행위가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아니, 누구세요... 어, 여기 지금 
저희 할머니 오실 건데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막으려고 했다. 할머니를 위해 마련하고 있는 자리에 왠 왜소한 몸집의 할아버지가 차지하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랬더니 한 중년의 남자 간호사분이 말하시기로, 


자기 할머니를 못 알아보네..


 낯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아, 맞다! 우리 할머니 뇌수술하느라 머리 깎으셨지...' 자세히 얼굴을 바라보니 할머니였다. '아... 할머니를 못 알아본 손녀라니...' 적나라한 수술실의 흔적과 한 땀 한 땀 새겨진 고통이 할머니의 두상에 남아 있었다. 할머니가 들으셨다면 속상하실만했다. 그리고 무서웠다. 3주 정도의 시간이 할머니를 못 알아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나... 



 벌써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그날의 상황에 대해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조차도 그렇게 예쁘고 우아하던 할머니의 얼굴에 콧줄이 달려 있는 걸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야말로 머리를 감을 때마다 코에 들어가는 물이 내겐 고문당하는 행위는 같게 느껴질 정도로 매우 괴로웠기에 아주 어릴 때부터 스스로 머리를 감겠다고 자초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콧줄은 내게 더 와닿는 아픔이다. 


 그런 할머니의 콧줄은 생명줄처럼 지칭되는데, 스스로 가래도 뱉지 못하고 음식물조차 기도로 반 식도로 반 넘기는 사람이기에, 콧줄이 없으면 제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도로 음식물이 자꾸 넘어가면 할머니가 폐렴 증상으로 아주 우리 곁을 떠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콧줄로 생활한 지도 벌써 8개월 차이다. 콧줄 생활이 일 년이 될 무렵에는 뱃줄로 옮겨야 된다고 한다.  


 콧줄도 뱃줄도 아닌 정상적인 음식 섭취가 가능했으면 좋겠다고... 요즘은 매일 그렇게 기원을 올리고 있다. 할머니가 영원히 콧줄로 생활할 수도 없고, 뱃줄로 옮기게 되면 할머니는 씹고 뜯고 맛보는 걸 전혀 못하는 사람이 될 테고, 다른 음식은 맛조차 볼 수 없는 입장이 될 테니까...   


 단, 콧줄도 뱃줄도 아닌 정상적인 방법으로 먹기 위해서는 연하재활을 받아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연하검사를 통과해야만 하는데... 할머니는 그동안의 연하검사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됐다. 연하재활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기도 하고 병원에선 터무니없을 정도로 더 힘든 과정이라는 것. 


 '시간이 드는 연습이라면 내가 도와드릴 수 있는데....' 할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게 쉽지 않은 환경.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내 삶의 일부분, 나의 새로운 가족. 포기하면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 아니, 더 나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적당한 지혜와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데... 이제는 우리 현명한 할머니에게 물어볼 수 없네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나이가 됐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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