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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지협 Jan 03. 2024

스스로 씻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기 시작하면서 욕실에 들어가 씻을 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더 많이 났다. 


나는 물과 떼려야 떼기 힘든 사이 같다 그제?

할머니는 용띠로 비와 물과 친해서 '청소'와 친하다는 우스개 말을 하시곤 했었는데, 여섯 남매의 맏이 딸로 챙겨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시집가서도, 딸을 시집보내서도 여전히 손에 물 묻힐 일밖에 없으셨기 때문이었던 것을 우리는 모두 이미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 같다. 


호강 한 번 누려보지 못하고 저렇게 병상생활을 하고 계신 할머니를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뭉개지는 기분이 든다... '왜 그땐 몰랐을까...' 


불과 작년 할머니 생신 때 신랑과 할머니 생신일자에 맞게 방문해서 소소하게 축하해 드렸던 짧은 영상을 보다 보니 그때 좀 더 맛있는 걸 사드릴 걸, 좋아하는 거, 하고 싶어 하셨던 거, 갖고 싶어 하신 거, 아니 좀 더 오래 같이 시간 보낼걸.... 이런 후회의 감정이 자꾸만 밀려온다.  


제게 "(킁킁) 너한테서 남자냄새난다~" 며, 억지로 씻게 만들고....  "머리 몇 번째 감았니? 잘 안 헹궜나 보네~ 머리냄새난다! 다시 감거라~" 하며 제 손에 샴푸를 짜 주시던 할머니. 우주 최강 깔끔 대장이라 여겨질 정도로 작은 먼지 티끌까지도 허용하지 않아 무척이나 같이 있는 것도 피곤하고 귀찮게 여겼던 것 같다.... 시험시간에도 매주 주말 하루 3시간씩 목욕하는 시간. 때밀이 값이라도 아낀다는 심정으로 서로 씻겨야 했기에 3시간은 기본으로 들었다. 그런 할머니를 따라 목욕탕에 가야만 했던 그 시절의 나는 불만의 연속이었고,


바쁘면 한 주 정도는 빠질 수 있지...
집에 욕조도 있고,
목욕비도 많이 드는데 ~ 
주말마다 왜 그렇게 가야 해요...? 


목욕 가기 싫다는 이유로도 참 불평불만을 토로했던 나의 어린 날. 그때 그 시절에는 시험 끝나고 뒤풀이 갔다가도 ~ 학원 하기 전에도 ~ 친구 생일파티 하다가도 ~ 집이나 목욕탕으로 소환되던 게 밥 먹듯이 있던 나의 부자유스럽지만 당연했던 날들. 


왜 그렇게 목욕가야 만 했는지 크게 와닿지 않았던 내가, 언제부턴가 할머니한테 물들어가고 있었는지,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목욕탕에서 느낄 수 있었던 편안함과 목욕 다녀온 이후의 노곤함과 꿀잠의 원리를 그리워하게 됐고 먼저 목욕탕 갈 채비를 하게 됐다는 사실. 


순탄하지 않았던 목욕탕
가는 길이었다
싸우고 혼나고 삐치다...
결국은 보듬고 의지하고..
미워해도 밥 한 술
먼저 권해주시던 할머니




결혼 이후는 할머니와 주말마다 다녔던 목욕탕 일과에서 99% 해방됐고, 할머니는 홀로 다니다 점점 혼자서는 못 다니게 되셨다, 단지 한 두 달에 한 번 내려갈 때마다 할머니와의 목욕일정은 필수였다. 


 지금 와서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나를 인간 지팡이처럼 생각하고 기대요~" 라며  약속했던 게 방금 떠올랐다.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아 드리며 이끌어 드렸던 나의 손과 다리가 후들거리던 할머니의 다리를 걸음을 목욕탕으로 뗄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자 이유가 됐던 게 아니었을까...?


그토록 목욕가 삶의 낙이었고 청소와 요리가 취미이자 일과였던 할머니...  스스로에게 조차 "나한테서 노인 내 나제?" 라며 갑자기 빨래를 돌리고 머리를 감으며 씻는 걸 봤을 정도로 씻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시던 할머니였기에 지금 침상에 누워 대소변을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을 하자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이 속상하다. 


할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나였다. 날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의 눈빛을 볼 때마다 속상하고 미안하고 죄송하다. 결혼적령기에 제때 결혼을 했으니 걱정을 덜어드렸다 생각은 했었는데... 홀로 둔 할머니가 영 마음에 걸렸지만, 함께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도 나쁘지 않은 거라고, 이 역시도 모든 사람은 혼자인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할머니 곁을 떠날 수 있었을 테니까... 


결혼했다 해서 나는 할머니로부터 독립된 게 아니었다는 걸, 할머니가 없는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없다는 것을, 할머니가 내 삶을 지탱하게 만들었던 뿌리와 같은 존재였다는 걸 지금 이 순간도 깨닫고 있다..  




 할머니의 희고 하얗고 보드라운 손에 

그어진 주름과 휘어진 손가락을 

당연하게 여겼던 나를 용서해 주세요... 


할머니가 가족을 위해 바친 

청춘도 보상드릴 수 없는데, 


노후 역시도 쓸쓸하게 보냈던 시간 끝에 

이렇게 불편한 공간 내 낯선 손길에 

몸도 마음도 의지해야만 하는 

당신에게 제가 뭘 어떻게 해드릴 수 

있을지 답답하고 속상할 따름입니다... 


 '내가 결혼을 안 했어야 했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상황의 연속. 내가 결혼할 수 있었던 것 역시도 감지덕지한 결과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할머니가 내게 준 확신이 결정적 요소였다. 지금은 그 누구도 내게 할머니 이상의 확신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할머니는 내 삶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전부라고 느껴질 때도 있을 정도지만 아마 앞뒤 분간 없이 할머니를 위해 내 삶을 던져버릴 정도는 아닌 걸 보면 할머니가 엄마와 내게 준만큼의 사랑은 따라가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나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더라도, 다른 그 누굴 위해서보다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조금 더 용기를 가져볼 생각이다. 할머니와의 약속... 뭐든 해내 보이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언제나 부족해 보였을 손녀였겠지만 할머니는 모진 소리에는 방패막이되어 주셨고 때론 창이 되어 주셨으니까. 철부지 꼬맹이였던 나는 강하고 단단해 보였던 할머니의 날 선 아우성 아래 숨어 사고를 쳤었는데, 그 모든 게 소중한 걸 지켜내고자 했던 엄마의 마음이셨을 테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할머니~ 왜 그러셨어요?



그런 할머니를 위해 나는 할머니의 편이 되어드리지 못했었다. 평화주의자인 나로서는 어떤 사람과 할머니가 투닥거리는 상황에서 무조건 무작정 ' 미안합니다~ '는 말을 먼저 했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할머니의 마음부터 헤아렸어야 했는데, 그게 가장 잘못이었다. 아니, 가장 속상했던 이유가 돼 버렸던 것이다. 생각보다 여리고 상처를 쉽게 받는 소녀 감성의 할머니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서까지 날 선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좀 더 할머니를 위해 큰 소리를 내고 옆에서 할머니를 먼저 위했더라면 조금 안심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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