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에겐 소중한 지인이자 친했던 형. 결혼 이후 처음 형을 만나는 자리에서 여자친구분과 함께 만났었다. 우리는 처음 인사를 나눈 이후 1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약속한대로 보게 되었다. 여행을 맞이하는 자세가 워낙 반대인 우리 부부는 아직도 짐을 챙길 때마다 괴리감을 느낀다.
여행은 하루 전날에 싸야 된다는 신랑.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 시간을 두고 미리 천천히 짐을 싸는 나. 이렇게 서로의 준비 방식에 대해서 무척이나 답답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얼추 내가 플랜 A부터 C까지의 옷차림 후보를 꺼내두면 거기서 고르게 하는 편인데... 사실 이렇게 글을 적긴 하지만 그다지 내가 꼼꼼하다거나 센스가 넘쳐 트렌드에 맞는 옷차림을 주장하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랑은 '가볍게! 실용적으로!' 추구하며 여행 그 자체로 즐길 줄 아는 사람. 이에 반해 나 같은 경우는 그의 마인드를 무척이나 부러워하고 존중하긴 하지만... 결국은 미리 대비하거나 짐을 싸두지 않으면 당일에 떠나는 건 불안 그 자체로 생각하는 사람. 미리 준비하지 않는 경우라면 여행지에서 모든 필요한 걸 살 수 있다면 그런 예외적인 조건이 붙는다면야 언제든 즉흥적인 모험도 오케이다.
하지만 나 같은 성격에는 일종의 '밑밥'이라는 기반을 깔아 두지 않으면 절대 시작은 불가능하다. 시작보단 행동을 하기 전에 포기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게 때문에 일정을 잡고 본격적으로 계획을 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무산할 생각이 크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렇듯 나는 갑작스러운 변경과 변화에 무척 예민한 편이고, 준비와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의 만남도 신중한 편이자 관계에 대한 지속조차 가볍게 여기는 편은 아니다. 다만, 오래된 사이가 아니라면 상황에 따른 상대의 태도에 따라 척도가 생긴달까. 오래된 사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배신이라거나 무관심이라는 싹이 마음의 대지에 틔운 이상 아무래도 소홀해지는 건 서로가 마찬가지 일 테니까...
우리 부부에겐 이전에 고백했다시피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다 보니 여러모로 친구까지 챙기는 게 어려운 입장이 됐다. 한결같이 가족과 친척, 지인까지 모두 챙기시던 아버지의 넓은 아량, 포용력과 책임감을 보고 자라다 보니 그게 당연한 거라 여겨 왔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위해 할머니를 위해서 그래왔다.
하지만 그건 보통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당연한 거라 생각했고 의무감으로 하다 '잘했다'는 칭찬받고 싶은 마음으로 할 때도 있었다. 결혼 이후 어느 정도의 관계가 정리된다고들 한다. 아무리 경조사, 명절 등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하는 인사치레라 할지라도 항상 먼저 건네야 하는 인사에 대한 부담감은 늘 있었다. 그리고 자존심도 상해왔다. Give and Take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어리다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 풍습이 있던가? 아님 친구래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 먼저 연락해야만 하는가? 싶은 유치찬란해 보이겠으나 이건 상대에 대해 얼마나,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표시인 셈이라 여겨진다. 대략 다섯 번 정도 연락하면 한 두 번쯤은 먼저 연락해 줄 법한데 그게 아니었다. 인사가 뭐 그리 중요한가 싶을 정도로 가부장적인 사고를 가진 젊은 꼰대라 해도 뭐라 변명할 생각은 없다. 후배나 동생에게 인사받을 권리에 대한 소리는 일절 한 적은 없었으나 내가 이렇게 한대서 부모님께서 인사받고 있는지는 내가 들은 바도 없고 알 길이 없으니까.
아무튼 결혼하기 전까진 책임과 의무,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이어왔다. 하지만 오히려 결혼 이후 누군가의 연락도 관심도 받는 경우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게 아닌 이상 연락 할 일도 이야기 나눌 거리도 없어진 셈이었다. 50대 퇴사 이후 느끼는 고독이 아마 이런 기분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달까. 그래서 독하게 마음먹었다. 먼저 연락하지 않기로... 십 년 이상을 먼저 해온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내 소식이 궁금할테고 그럼 연락을 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을 가져보기 위해 시작하게 된 행위였으나 결과는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 가버렸다.
나름 아주 헛되이 살진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후 나는 사람 간의 관계는 비즈니스나 목적에 의한 소통이 주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삭막한 판단을 하게 된다. 물론... 나 역시도 다른 이들의 삶과 감정을 이전처럼 그렇게 관심 있게 들여다보거나 알려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쉽사리 내게 그러지 않는 것처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새 말이 꽤 길어져 버렸으나 한 마디로 나는 관계를 지속하는 힘이 약한 편이라 상대가 다가오지 않으면 쉽사리 다가가지 않는 사람. 그래서 낯선 사람에겐 더욱 거리를 두는 편이다. 대신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기로... 고독한 삶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뭐,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 무슨 준비가 필요하겠으나... 만남과 이별 그리고 관계 유지에 있어서 우린 언제나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곳을 잠시 떠나는 지금마저도 이렇게 짐을 싸는데 신중을 다하게 되는데... 오래 살펴봐야 아는 사람과의 관계는 오죽하겠나 싶다.
내가 후보를 정하고 짐을 챙기는 시간에 비해 아주 간단하게 짐을 정해버리는 그의 확신과 선택이 무척 부러워서 가끔은 짐 싸는 걸 전담시키고 싶지만 사실 빠뜨리는 게 많을 것 같아 묵묵히 그리고 곰곰이 여행가방을 살펴보며 뺏다가 넣었다가 짐을 분산시킨다. 손이 자주 가는 물건인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꺼내기 쉽게 용이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이토록 우린 준비를 통해 대비를 한다. 이게 바로 나의 지론인데 준비과정이 없다면 여행의 의미도 내겐 대충그린 데생이나 마찬가지랄까. 준비는 현재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면서 미래를 맞이하는 과정인 셈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할머니 곁에 없지만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지금 역시, 할머니와의 새로운 만남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준비시간이자 대비시간이지 않을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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