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눈물과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던 7살 아이
20년 만에 계약기간이 끝난 상조회사 채권을 보여주는 어머님. 사느라 뒷전이었던 계약을 이제야 꺼내 보셨는지 여행이나 가자면서 슬그머니 꺼내 놓으셨다. 해지를 하고 돈으로 받을 수 있을지는 애매한 입장인데, 나는 살아온 인생에 비해 너무 일찍 현실과 마주했던 7살, 그날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 이 나이가 되더라도 생각나는 그 맛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 그날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환상적인 조합으로 기억에 남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맹장수술을 치른 지 삼일 째 되던 날,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받는 전화는 할머니를 다급하게 찾는 연락이었고 이내 화가 잔뜩 오른 할머니의 모습을 보게 됐다.
결국 할머니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던 나는 환자나 마찬가지인 할머니를 따라 사실 확인을 위해 길을 나섰다. 길을 나서기 전 할머니는 수술한 자리에 파스를 붙이고 허리밴드를 감싸고서 배를 부여 안고 나갔는데 그때까지 나는 그 길이 할머니에겐 엄청나게 두렵고 무서운 길이었단 걸 지금에서야 깨닫게 됐다.
내게 단단히 일러뒀었다, "혹시 내게 뭔 일이 있으면 뛰쳐나가 어디든 꼭 알려라~" 무서운 마음이 들면서도 별일 있겠냐는 마음으로 갔던 곳은 다름 아닌 파이낸셜 회사였다.
7살 아이의 시선에서도 난장판에 울부짖음이 들렸고 여러 사람들이 바닥에 들어 눕거나 소리를 지르고 항의하는 모습, 그리고 이들을 제지하는 정장 입은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었다. 무서운 마음에 할머니를 꼭 부여잡고 있었다. 그런데 무서운 마음은 잠깐, 아픈 환자나 마찬가지인 할머니가 걱정이 됐다.
할머니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확인 차 방문했던 건데,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으로도 사태를 파악하기엔 충분했었다. 대표한테 따져볼 심산으로 할머니는 무작정 방에 들어갔고, 얼떨결에 나 역시도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는 열변을 토하며 수술자국을 보여줬고... 애원 끝에 겨우 투자금이라곤 하루아침에 증발한 셈으로,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돈 몇 푼을 위로금으로 받고서 그 자리를 떠야 했다.
알고 보니 친하게 지냈던 동생 피리님의 권유로 할머니는 한번 넣어보고 작은 수익에 만족을 하곤 가족과 지인의 수익까지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함께 넣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흔히 끝물로 불리는 막판에 투자한 셈이라 손해를 본 개미 투자자였다.
돈 몇 푼 받은 거라도 다행이라 여기며 돌아오던 길에 할머니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걸 알아차리고는 편의점에 가서 내게 "먹고 싶은 걸 골라봐라~ 네 덕에 이돈 받았네." 하시며 없는 살림에도 한 턱 쏘셨다. 할머니는 늘 그랬었다. 몇 푼 손에 쥐고 있음 언제든 내가 뭘 살 때도 서슴없이 보태주고 싶어 했고, 뭘 먹고 싶어 하는 모습에 선뜻 사다 주시곤 했던 정 많은 할머니셨다...
빠르게 육*장 컵라면 하나와 콘 아이스크림 하나를 집어 들고는 계산대로 갔었다. "할머니는요?"라는 말을 건넸는데, 할머니는 "나는 배 안고프다." 시면서 나와 함께 절에 갔던 기억이 난다. 단지 나는 빨리 가서 먹어야지 그런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었는데, 그때 할머니의 오장육부 상태는 말도 아니었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얼마나 괴롭고 속상하고 힘들었을까...
나는 그런 할머니를 옆에 두고서 허겁지겁 먹기 바빴다. 할머니의 상태를 잘 몰라 눈치 보다 한 젓가락 건네고 싶은 마음 참고서 혼자 먹었다. 덜 익은 컵라면과 1/3이 녹은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먹으며 배가 채워지는 포만감에 기분이 좋아졌던 철부지 7살 손녀였다. 어떤 심정이었을지... 나로서는 짐작만 될 뿐이지만 할머니는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잠재우고 슬픔을 씻어내고 시간이 필요했을 테다. 나는 조용히 그리고 할머니를 기다렸었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할머니는 투자를 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벼락부자라거나 재테크에 대한 꿈과 희망을 버리고 그저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기회를 잘 잡아서 벼락부자가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때마다 배도 아프고 속도 쓰리고 뭐 그럴 때도 있지만 처음부터 그게 내 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지금도 나는 투자와는 거리가 멀고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다 보니 뭘 해보는 것조차 어려운 편이나 세상이 변하고 있고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계속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걸 알게 된다.
누군가에겐 아주 사소한 편의점의 컵라면이고 아이스크림이겠지만 생각해 보니 내겐 추억과 인생이 담긴 음식, 컵라면과 아이스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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