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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지협 Mar 01. 2023

할머니, 나랑 시장 같이 갈래요?

몸은 힘들어도 왠지 다녀오면 뿌듯했던 그 시절의 할머니와 나는 이미 친구

요즘은 할머니엄마를 할마라고 부른다고들 한다.


나만 아픈 엄마의 빈자리를 할머니가 메운다고 여겼던 속없던 어린 날의 나. 요즘 말처럼 할마와 함께 보냈던 나는 이 말이 매우 공감됐다. 성년이 되고 나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tv를 통해 보고 듣게 된 많은 이들의 조부모님의 손에서 자라났던 이야기. 지금 우리 주변도 할마의 손을 통해 커가고 있는 아이들. 무조건 엄마 손에서 자라는 게 당연했다는 건 편견이었나 보다 싶어 부끄러워졌다.


겉보기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엄마. 남들에겐 아프다고 불렀으니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항심은 날이 갈수록 더 커졌던 것 같다.  어린 날의 내 눈 속에 비쳤던 엄마는 단지 매일 안방에 누워있었을 뿐이었다. 누구보다도 재잘거리며 이야기 잘할 수 있었는데... 엄마는 기운을 좀 채릴 때면 숙제기입장이나 가정통신문을 살펴보고서 챙겨주시며 숙제를 도와주셨었다. 엄마는 티 내지 않게 매우 독한 약을 복용하며 남몰래 힘든 시간을 겨우 겨우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난 단지 엄마에게서 받고 싶었던 온기와 인전였기에 그 누구에서도 받을 수 없었고 그건 대체불가능한 것이었다. 


선생님, 할머니, 아빠역시도 나는 감당하기 힘든 존재였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기 때부터 우렁찼던 울음소리와 고집불통의 관종. 그래서 달콤한 유혹이라거나 사랑의 매로써는 자제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소소한 사건사고들로 가득했던 어린 날의 나는 사고뭉치라 불렸겠지만, 이유 없거나 생각 없이 했던 행동은 아니었었다. 


내 입장에서 온전히 이해해 주는 이가 있었다면 유아기 반항은 그때 멈췄을 것이다. 내겐 단지 착각과 착오가 있었을 뿐이었다. 도덕에 대한 관념이 생기고 나서는 그 누구보다 양심을 우선으로 움직이는 인형과 같았다. 그러나 막무가내의 고집쟁이는 유일하게 할마를 따르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보다 더 큰 존재로 나를 이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게 할머니였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존재보다 할머니를 엄마로 여기며 따랐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비록 젊고 예쁜 엄마와 함께 등장하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그 부러움을 감추기 위해 몹쓸 장난으로 나를 감추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할머니가 부끄럽다기보단 나는 할머니가 있어서 든든했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해드리지 못한 무조건적인 내 편이 되어주시던 모습을 아주 가끔씩 보게 됐으니까 말이다. 나는 아직 할머니와 알고 지낸 삼십 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이유불문하고 할머니의 편에 서드리진 못했었다. 무엇이 중요했던 건지, 입장을 듣기보단 무조건 할머니 반대 입장으로 먼저 바라보고서 중재를 위한 노력만 해왔었다. 


그렇게 자라온 나는 아직도 할머니 편이 되드리기엔 많이 부족했고 어색하다. 하지만 할머니가 내게 보여준 무조건의 사랑은 언제나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 벅찬 감동과 고마움으로 마음을 물들였었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아마도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로... 내겐 처음 사랑이라는 단어를 알려준 사람이지 않을까?


할머니와 손녀 사이는 가깝고도 먼 사이.


영혼의 단짝인 할머니와 나는 최소 한 달에 한 번씩은 먹을 것을 사러 간다거나 옷을 사러 가거나 생활하는 데 필요한 생필품을 사러 가러 시장에 갔었다. 


별다른 수입이 없던 우리는 백화점이나 아웃렛보단 시장이 더 반가웠고 친근했던 공간이자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할머니와 내 사이의 전선도 시장에 다녀오고 나면 풀리곤 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의 효과랄까? 간혹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가 머리 위까지 뻗으실 때면 나로서는 피할 수 없는 망신살 혼을 당하게 되지만 그나마 사람들이 있어서 방패막이되어주지 않을까 싶어 상황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곤 한다. 물론 그러면 내게 돌아오는 화살은 더 빠르고 깊숙하지만... (한마디로 어른들은 토다는 걸 매우 싫어한다는 사실) 


어린 날의 내가 할머니와 같이 살던 곳을 떠나 한 시간이 훨씬 더 넘는 곳으로 이사를 갔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은 할머니와 나를 아주 가끔씩 불러내고 있었다. 어린 날의 추억이 가득한 시장을 찾던 시간의 간격은 점점 늘어났고, 그새 달라져 있던 시장의 모습도 낯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향수가 그곳에 아직 남아있던 탓인지 1년 만이라도 할머니와 간혹 날 잡아 어렵게 방문하곤 했었다. 


점점 할머니의 발걸음이 나를 따라오기 힘들어지는 걸 알게 됐다. 숨이 가빠 움직이는 게 전과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됐다. 허리도 뻐근하고 다리무릎관절의 쓰리고 아린 몹쓸 노화현상이 할머니를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할머니는 걷다가 멈춰서는 걸 반복했다.


이전에 마취주사로 인해 수술에서 못 깨어났던 기억으로 인해 수술은 생각지도 못하는 할머니는 그 무엇보다 돌봐줄 사람이 없는 씁쓸한 독거노인의 삶의 무게 때문에 열심히 살아온 훈장 말고 내려앉은 어깨연골회복을 위한 어깨연골파열수술도, 바닥으로 주저앉게 만드는 허리통증을 멈추게 만들 희망의 무릎수술도 병원 의사가 수술얘기 꺼낼 때마다 머뭇거리시며 수술 못하는 이유부터 꺼내놓곤 자신 없다며 걱정하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시며 끝내 막무가내로 견뎌보겠다는 말만 하셨다. 

   

진통주사로 하루하루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할머니가 왜 그리 안쓰러운 건지... 젊은 날의 할머니는 나를 위해 희생해 주셨는데 정녕 할머니가 간절하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드리지 못하는 내가 밉고 속상하다. 결혼하기 전에는 전혀 생각지 못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결혼해서도 비록 거리는 멀다면 참 먼 거리지만 한 달에 한 번쯤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아량 넓은 시부모님과 신랑 둔 덕분으로 할머니를 챙기는데 큰 어려움은 있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선택했던 건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아무래도 오만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무래도 결혼이라는 과정은 수능, 취직과는 다르게 엄청난 선택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걸 모르고서 당연히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만 여겼고 이에 따른 부수적인 문제나 달라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차차 불거지는 문제들과 상황들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아주 가끔은 정말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몰라 쩔쩔매곤 한다.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의 아내가 되면서 알게 모르게, 할머니를 챙기는 것조차도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아주 애매한 위치에서 느끼는 소속감. 결혼 전의 나라면 이런 불편한 마음은 가지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싶다가도, 현재 위치에서의 최선에 대해 생각하면서 견뎌내 본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신랑의 말 


한편으로 고마우면서도 대책 없는 그 말에 위로라기보다는 어쩌겠어라는 마음이 더 드는 게 당연했다. 나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충분히 알고 있기에 너무 고마우면서도... 내게 그 누가 건네는 위로일지라도 단지 고마우면서도 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의 건강상태가 안 좋아지는 걸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전해 듣게 되면서 더 어린 날의 할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고 현재 내 눈앞에 있는 나이 들어버린 할머니께 미안함이 훨씬 크다. 


부평동에 가고 싶네...  


할머니와 보냈던 희로애락이 시장 길에 남아있던 탓에 나는 시장을 참 좋아한다. 다른 지역에 이사 와서 혼자 놀러 다니는 시장에서조차도 어린 날의 내가 했던 행동 그대로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머리로 가격을 비교하며 발품을 팔러 다니며 장바구니에 하나씩 담아내서 집에 와서 풀어보고 집안 곳곳을 채우며 느끼는 희열. 


나는 할머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옷장사를 하셨을 정도로 패션이나 미용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서 깎는 것도 잘하시는 만큼이나 단골이 되어 시장사람들과 앞면 터기는 게 수월했던 사교적인 할머니. 할머니를 보고 있을 때면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나와는 완전 다른 모습이라 놀랍고도 부럽고 대단하다며 롤모델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는 비슷한 듯 달랐다. 할머니의 영향이 알게 모르게 컸던 유년시절... 


결혼 후 내 인생에 당장 터치할 어른이 없는 현재는 아무래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보단 좀 더 본래의 내 모습에 맞게 좀 더 나다울 수 있도록 풀어진 상태라서 어색하면서도 오히려 나를 이제야 찾는 기분이다. 몸에 맞는 속옷을 입는 것처럼... 그래도 어린 시절의 내가 리스펙 했던 할머니에게 스며들어 내 또래와는 다르게 매우 남다른 바른생활의 표본으로 살았던 만큼 잠시나마 '대단'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고 싶기 기도한데, 지금은 자유시간을 주고 싶었다.


할머니가 어르신센터 일과 중에 부평동 시장에 가고 싶으셨는지 친구분과 남모르게 약속을 하셨단다. 일은 그때부터 시작됐었다. 걷는 게 힘든 만큼이나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이 훌쩍 넘는 버스나 지하철 이용은 아무래도 80세 중반을 넘는 할머니 둘에게는 어려움을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날의 할머니가 억척스러운 책임감으로 해냈던 성과들이, 나이 든 할머니는 터무니없는 고집이 되어 어린 날의 사고뭉치였던 나로 보여주시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내가 작은 돈으로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던 즐거움과 재미, 만족이 존재했던 우리들의 데이트장소였던 시장은 추억이 되어 이제는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립고 안타깝고 슬픈 현실이다. 운동신경이 꽝인 나로서는 운전대 잡는 일은 평생에 있을지 의문인 뚜벅이지만... 나는 할머니가 원한다면 같이 시장에 동행할 마음만큼은 충분했다. 


단, 할머니가 스스로 견뎌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은 어찌할지 모르겠다. 행복한 시간을 기억 속에서 눈앞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나 역시 가끔 생각날 정도로 그리운 할머니와의 시장데이트는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 시절의 나와 할머니는 몸은 고달팠고 지갑은 텅 비었지만 두 손은 무거워서 행복했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서로를 더없이 친하게 생각했던 시장메이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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