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나름 좋아하지만 이런 류의 글쓰기는 나를 공개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어서 매번 나 혼자 쓰고 혼자 읽다가, 그러다 보면 누군가도 읽고 공감해줬으면 좋겠고 함께 즐거워했으면 좋겠어서 공개적으로 써보다가, 또다시 나를 솔직하게 공개하는 것이 무서워지기도 한다.
어쨌든 일단 안물 안궁 내 이야기를 살짝이 써보려 한다.
나는 전업이 디자이너였고 현업은 의사다. 의학전문대학원이라는 체제가 생기면서 가능했고 지금은 점점 길이 좁아져 몇 년 후면 또다시 찾기 힘들어진 부류에 속한다.
나의 일이십 대는 돌고 돌고 돌았다. 십 대의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라 했지만 나만의 작품세계를 펼칠만한 천재적인 작가적 소양은 없다는 걸 일찍이 파악했다. 그러던 중 컴퓨터를 이용해 그래픽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멋져 보여 이과를 선택했다. (컴퓨터를 써야 해서 이과인 줄 알았던 단순한 선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니 수학2와 화학2를 선택해서 시험을 보라는데 도저히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나의 두뇌회전으로는 감당하기가 초큼 버겁다는 생각에 잽싸게 예체능 진학으로 진로를 바꾸고 입시미술학원을 등록했다. 내 머리의 한계를 깨달은 후 방향 전환은 빠르게 했으나 이미 깨달은 시기가 늦었다.
"여기 예체능 한 명 사람 있다며? 누구지, 손들어봐."
고2에 실기 준비를 처음 시작했던 쪼꼬만 여학생은 여전히 이과에 몸담은 채 뒤늦게 실기는 학원에 의지했고 이과 친구들과 같은 교실에서 모의고사는 예체능 시험지를 받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학원에서는 겉돌았고 학교에서도 주목받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예술적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한 것은 다분히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여하튼 힘겹게 고3을 마치고 짧은 실기 준비와 부족한 실력 탓에 당연하지만 슬프게도 원하는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했다. 재수를 하겠다 외쳤지만 집에서는 반기지 않았다. 의외로(?) 순종적이고 당시의 나는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길을 나 홀로 진취적으로 끌고 갈 만한 깡도 없었기에 그대로 주저앉아 졸업까지 마첬고 일을 시작했다.
처음 봉착한 곳은 영화계였다. 당시 나름 유명한 작품들의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맡아 활동 중이던 미술감독님이 꾸리는 팀으로 들어가 열정 페이를 받으며 전혀 열정은 없이 일을 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기 전 배우들에게 시나리오가 가듯 미술감독에게도 시나리오와 함께 의뢰가 오면 시나리오를 읽고 분석하여 전반적인 영화의 색감과 인물이 등장하는 모든 공간, 나아가서는 의상과 소품까지도 디렉션을 하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다만 열정이 없었던 쪼꼬미 신입 팀원에게 있어서는 버티기 힘든 환경이었다. 사무실에서의 업무는 감독님 지시에 따라 해당 씬(scene)의 디자인에 일조하는 일이었지만 현장에 나가서는 대기와 대기와 대기의 연속이었고 미술 팀원의 임무는 씬의 연결이 중요해서 이전 촬영의 소품 위치와 하다못해 꽃밭의 꽃 위치와 색상까지 체크했다. 묘지가 배경이었던 한 장면에서는 휑한 언덕배기에 묘를 만들어야 했고 주변에 심을 나무와 꽃을 공수해야 했다. 몇 주간 지방 촬영이면 모텔에서 생활하고 겨울 야외 촬영에서는 극한의 추위와 싸우며 손끝이 심하게 갈라져 매일 풋크림을 핸드크림 대신 사용했다. 물론 젊음이 주는 나름의 낭만과 동료들과의 소소한 노닥거림이 즐거움을 주긴 했지만 지금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많았다.
유치하지만 몸이 고되다 보니 막연하게 블루칼라 인생에서 화이트칼라 인생으로의 전환을 꿈꾸게 되었다. 현장에서 삽질을 하면서 가만 보니 (삽질은 비유적 표현이 아닌 진짜 삽질) 미술팀이 가장 고학력자들인데 하는 일은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느낌이라 왠지 모르게 언짢았다. 여기서 또 한 번 나의 꼰대스러운 사상이 빛을 발하는 언급임을 나도 여실히 인정하고 스스로 민망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게 나란 인간이다.
인생은 정말 생뚱맞은 시기에 생뚱맞게 던진 한마디로 생뚱맞게 큰 고민 없이 선택하여 흘러간다.
엄마는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나보다도 더 단순한 사고 회로를 거친 듯 말했다.
"의사를 해보는 건 어때? 너 이과였잖아."
그래서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세상 단순하게 '너는 이과였으니 의대 진학을 해보라'는 중간과정이 생략된 듯한 다른 이과생들이 들으면 매우 불편해 할 권유는 우리 엄마 말고는 아무도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나는 이과에 소속만 되어있었을 뿐 수능 임박해서는 수학 2, 과학 2 시간에 나 홀로 공통수학, 공통과학 수능 문제집만 풀고 있었던 기억만 남아있었다.
"아 뭐래." 대답하고는 바로 학원을 등록한 나도 의아하긴 마친가지였지만.
그렇게 내 인생의 암흑기를 1년 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오히려 무념무상하며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살아온 1년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기이기도 하고 그때의 초단순했던 생활 패턴이 아주아주 조금은 그립기도 하다. 주변 사람에 영향을 잘 받는 나는 일부러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고 눈 뜨면 동네 도서관으로 출근해서 도서관 열람실이 문 닫는 시간에 퇴근했다. 하루 중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은 김밥천국 아주머니와의 살가운(?) 대화시간뿐이었다.
"여기 김볶 하나 주세요."
"학생 신발 예쁘네. 이런 건 어디서 살 수 있어?"
"이거 인터넷에서 산 건데 제가 사이트 적어드릴게요."
그때 김천 아주머니 아니었으면 세상 나불대길 좋아하는 내가 하루를 버티는 게 상당히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가 참으로 합리적인 나라인지라 다행히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위한 MEET 시험과목에 수학 2는 없었고 당시 나에겐 듣도 보도 못한 유기화학과 딴 세상 이야기인 물리가 있긴 했지만 거뜬히 물포 선언하고 다행히 언어와 생물이 재미나 시험 준비 1년만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미술 학부 전공자가 신기해서였는지 새로운 인재 발굴과 의료업계에 새로운 국면을 맞자는 취지에 걸맞았던 건지 나를 반갑게는 아니더라도 맞이는 해 주었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반전따위는 전혀 없이 나는 너무나 허덕이며 본과 4년 과정을 겨우 마치고 인턴과 레지던트까지 마쳤다. 물론 그 안에는 나의 피눈물과 처절함이 있었지만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인간의 특성과 (나의 특성인가) 자기 합리화 대장으로써 내 역할 수행을 하다 보니 지금은 다 좋은 추억이고 뿌듯한 과거였던 걸로 이번 글은 마무리 지으려 한다.